헌법재판소가 이른바 ‘기후 소송’에서 ‘탄소중립기본법이 (2050 탄소 중립을 국가 비전으로 정해놓고도) 2031년부터 2049년까지 (중간 단계의) 정량적 감축 목표를 제시하지 않은 것은 국민의 환경권을 침해한 것”이라며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현재 140여 국이 탄소 중립을 약속했고, 선진국은 대개 2050년을 목표 연도로 삼고 있다. 2050년까지 이뤄내야 기온 상승을 1.5도에 맞출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따져볼 문제는 ‘2050 탄소 중립’이 현실적 목표인가 하는 점이다. 마침 저명한 통계 분석가이자 에너지·환경 석학인 바츨라프 스밀 캐나다 매니토바대 명예교수가 지난 5월 ‘교토에서 2050까지의 중간 평가’라며 발표한 보고서가 있다. 교토의정서가 체결된 1997년에서 2050년까지 가는 반환점에서의 분석이다. 그의 결론은 ‘2050 탄소 제로는 가능성이 거의 없는(highly unlikely) 목표’라는 것이다. 81세 스밀은 포린폴리시가 ‘세계적 사상가 100인’에 이름을 올렸고, 빌 게이츠가 ‘사람들이 스타워즈 시리즈 기다리는 만큼 스밀의 책을 기다린다’고 했던 저술가다. 43권의 책을 냈고, 국내에 여덟 권이 번역됐다.
통계의 대가답게 그는 숫자로 의표를 찌른다. 1997년 세계 에너지 소비에서 화석연료 비율은 86%였다. 그 후 각국의 집중 투자와 기술 진보에도 2022년 비율은 82%로 눈곱만큼(marginally) 떨어졌을 뿐이다. 그 25년간 화석연료 소비량 절대치는 오히려 55% 늘었다. 스밀은 ‘세상은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가(2022년)’라는 책에선 독일이 20년 넘게 극성스럽게 에너지 전환을 추진했지만 화석연료 비율을 84%에서 78%로 낮췄을 뿐이라고 꼬집었다.
스밀은 에너지에 관한 한 관련 전문가들조차 ‘규모’에 대한 감이 없다고 지적해 왔다. 우리가 쓰고 타고 이용하고 먹는 자동차, 철, 시멘트, 집, 식품, 컴퓨터 등 모든 것이 에너지 덩어리다. 예를 들어, 미국 부유층 가정의 에너지 소비량은 건장한 노예 6000명을 거느렸던 고대 로마시대 귀족 수준이다. 그것의 80%가 석탄·석유·가스로 공급된다. 그 막대한 화석 에너지로 자동차 15억대, 트랙터 5000만대 등 농업기계, 관개 펌프 1억대, 가스보일러 5억대, 상업용 선박 12만척, 제트기 2만5000대가 움직인다. 이것들을 한 세대 사이 무탄소 에너지로 대체한다는 것은 상상 불능의 경제적 비용을 치르거나 기적의 기술이 등장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중국은 자동차 소유가 1999년 100가구당 0.34대에서 2019년 40대로 늘었다. 20년 동안 100배를 넘었다. 에어컨은 30년 사이 400배 보급됐다. 그러나 아프리카·아시아의 30억명은 아직 땔감, 동물 배설물을 취사 연료로 쓴다. 1인당 에너지 소비가 중국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아프리카가 기후 때문에 산업화의 길을 양보하겠냐는 것이다.
스밀은 휴대폰이 순식간에 유선전화기를 퇴출시킨 것과 혼동하는 건 ‘범주의 오류’라고 했다. 에너지 전환은 태양광·풍력만 세우면 되는 것이 아니라 광대한 송배전 설비, 전력 저장 장치, 그리고 산업 설비를 모두 바꿔야 가능하다. 철강·시멘트·플라스틱·비료 등 문명을 떠받치는 4대 물질의 온실가스 비율이 25%인데 아직 무탄소 대체 생산 기술이 없다. 아스팔트와 윤활유는 또 뭐로 대신하느냐는 것이다. 스밀은 “너무 많은 사실이 한 방향을 가리킨다”고 했다. 2050 탄소 중립은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2050년 화석연료 비율을 48%로 내다본 노르웨이 분석 기관 전망이 현실을 반영한 예측이라고 했다.
컴퓨터로는 공기 중에서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여 지하에 저장한다는 식의 몽상적 기술까지 동원해 1.5도건 탄소 중립이건 그래프를 뚝딱 맞춰놓을 수 있다. 스밀이 볼 때 그것들은 공학적 가능성을 도외시한 소망 사고에 불과하다. 권위 있는 에너지 분석 기관 BNEF 설립자 마이클 리브라이히도 지난 2월 2050 탄소 중립 가능성 분석 보고서에서 “어떤 가능성도 없다”고 했다. 2070년이라면 혹시 모른다는 것이다. 2070 탄소 중립이면 기온 상승치를 2도 아래로 억제할 수도 있다고 했다. 중국 경우 탄소 중립 달성 연도를 2060년으로 10년 늦춰 잡고 있다.
탄소 중립은 장기적으로 이뤄야 할 목표인 것은 분명하다. 기후 소송 같은 퍼포먼스도 집단적 각오를 다진다는 의미가 있다. 다만 전망이 없는 2050 탄소 중립을 진지한 국가 목표로 삼아 비현실적 경로를 설정해 자기 발목을 묶어버린다면, 그건 신중한 자세가 아니다. 탄소 중립과 탈원전이라는 두 마리 말을 반대 방향으로 묶어놓고 국가라는 마차를 움직이려 했던 지난 정권의 무모함은 쓴웃음을 짓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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