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선서를 하고 있다. /뉴스1

윤석열 대통령 말 중 두 가지가 기억에 남는다. 하나는 그 유명한 “사람한테 충성하지 않는다”고, 또 하나는 “선수는 전광판을 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전광판 발언은 대선 후보 때인 2021년 12월, 이재명 후보에게 지지율이 역전당했을 때 나왔다. 틀린 문제를 계속 틀리는 학생처럼 그때나 지금이나 지지율 하락 이유가 같다. 김건희 여사 문제, 국민의힘 대표와 치른 갈등이었다. 윤 대통령은 전광판을 언급하며 지지율 신경 안 쓰고 앞만 보고 뛰겠다고 했다.

하지만 전광판 발언 전후로 윤 대통령은 울산에 내려가 이준석을 만났고, 김건희 여사는 허위 경력 논란에 사과 회견을 했다. 말로는 전광판을 안 본다고 했지만, 대선까지 시간이 없음을, 그리고 이재명 후보에게 뒤처졌음을 파악하고 있었다. 전광판을 보며 행동할 때를 놓치지 않았다. “과거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국민 눈높이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하겠다”고 한 김 여사 회견 이후 MBC는 김 여사의 ‘7시간 녹취록’을 터트렸다. 그러나 민주당에서조차 “한 방이라더니 뭐냐” 할 정도로 비난 여론은 오히려 MBC로 향했다. 김 여사의 선제적 회견이 있어 가능한 반전이었다.

취임 후 윤 대통령은 정말 전광판을 보지 않은 것 같다. 전광판에 빨간불이 들어와도 몰랐거나 아니면 모르는 척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그래도 변화를 기대했던 관중까지 하나둘 응원석을 떠났고, 총선에서 이긴 야당은 선수의 중도 퇴장을 공언하고 있다. 전광판에는 점수와 남은 시간이 나온다. 누군가 만든 ‘윤석열 퇴임 시계’ 사이트를 보니 윤 대통령 임기는 9월 13일 현재 969일 남았다. 임기 진행률은 47%로, 아직 반환점도 돌지 않았다. ‘퇴임 시계’에 나타난 초 단위의 의미를 대통령이 깨달아야 한다. 윤 대통령이 지금 보내는 1초, 1분, 1시간이 누군가에게는 평생 모든 것을 걸고 쟁취하고 싶었던 1초, 1분, 1시간이다.

윤 대통령은 뭘 하고 싶어 대통령이 되려 했을까.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그래서 취임사를 다시 읽어봤다. 원고지 17장 분량이었다. 지난달 원고지 100장에 육박하는 기자회견 모두 발언과 달리 가르치려 하지 않고 간결하고 강렬했다.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해치고 있다” “개인의 자유가 침해되는 것을 방치하면 우리 모두의 자유마저 위협받는다. 모든 자유 시민이 연대해야 한다” “공정한 규칙을 지키고 연대와 박애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 “과학기술과 혁신으로 자유를 확대한다” “자유, 인권, 공정, 연대의 가치”라고 했다. 취임식에 참석한 박근혜, 문재인 전직 대통령들에게 감사를 표했고, “팬데믹 극복에 헌신해 준 의료진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지성의 힘으로 야만에 맞서고, 자유와 연대로 국민을 통합하고, 과학기술로 성장을 이뤄 양극화를 극복하겠다는 포부와 열정이었다. 그곳에는 내부 총질 텔레그램도, 홍범도 동상도, 의료 사태와 연구·개발 예산 삭감도, 킬러 문항도, 박절하지 못했다는 변명도, 오만과 독선도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다. 한동훈과 겪은 갈등, 김 여사 문제 해법도 취임사 안에 있다. 격노의 자리엔 격려가 채워질 것이다. 대통령이 취임사를 다시 읽어 보고 반환점에 서길 바란다. 자유와 연대를 강화하고 과학자들과 의료진을 격려하며 대한민국을 전진시킬 수 있는 시간을 전광판은 보여주고 있다. 이젠 전광판을 봐야 한다. 응원석을 떠났지만, 운동장 주변을 서성이는 관중이 아직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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