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희 여사가 '세계 자살 예방의 날'인 지난 10일 용강지구대 근무자들과 함께 마포대교를 순찰하고 있다. 김 여사는 “미흡한 점이 많다””개선이 필요하다”는 등의 지시조(調) 발언으로 '국정 책임자 같다'는 지적을 받았다. /뉴시스

의료 선진국을 자부하는 나라에서 “아프지 마세요”란 인사가 유행했다는 것은 참담한 얘기다. 추석 연휴 중 구급차에 실려 가기라도 하면 큰일이라며, 조심하라는 말로 한가위 덕담을 대신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다행히 대란은 없었지만 결코 호들갑이 아니었다. 탈진한 의사들이 한계에 몰리고 ‘응급실 뺑뺑이’가 잇따르는 현실 앞에서 “아프지 말라”는 것은 그야말로 실존적인 불안감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의료 개혁엔 누구나 동의한다. 그러나 실행 방식이 너무도 거칠고 과격하고 무모했다. ‘2000명씩 5년간 증원’이란 수치부터 비현실적이었다. 개혁을 한다면서 개혁 대상을 어떻게 설득할지 면밀한 실행 계획도 없이 밀어붙이기만 했다. 지금 윤석열 정부가 고전하는 것은 문제 해결 능력의 빈곤 탓이다. 이유야 어쨌든 국민으로 하여금 ‘아프면 어떡하나’를 걱정하게 하는 것은 제대로 된 정부가 아니다. 개혁은 꼬일 대로 꼬인 채 의사 집단만 반정부 투사로 내몰고 말았다.

의사뿐 아니다. 대통령의 격노로 시작됐다는 ‘채 상병 사건’으로 해병대 예비역들과 충돌했고, 연구·개발 예산 삭감 소동으로 과학기술인이 등을 돌리게 했다. 윤 정부가 전쟁을 벌인 의사·해병대·과학자들은 어느 직종보다 확고한 국가관과 공적 마인드를 보유한 집단이다. 자유 민주주의를 신봉한다는 보수 정권이 보수의 주력 직업군과 잇따라 충돌하며 내전(內戰)을 벌이고 있다. 우군을 적으로 돌린 셈이다.

보수는 현실주의자다. 실천 가능성을 따져가며 점진적·실용적으로 풀어가는 것이 보수의 문제 해결 방식이다. 윤 정부 국정은 보수의 스타일과 거리가 먼 경우가 잦다. 충분한 검토와 준비 없이 대통령의 일방적 지시로, 혹은 느닷없는 격노로 무리하게 밀어붙이다 파열음을 내곤 했다. 의정 갈등은 출구 전략도 못 세운 채 파행을 치닫고, 해병대원 사건은 특검 공세를 자초했으며, 연구·개발 예산 삭감은 1년 만에 백기 투항하는 치욕을 맛봤다. 이것은 유능한 보수가 일하는 방식이 아니다.

윤석열식(式) 정치는 보수의 영토를 잘라내는 ‘뺄셈의 정치’에 가깝다. 청년 정치의 대표성을 지닌 이준석을 여당 대표에서 끌어내리고, 여권내 일정 지분을 갖는 안철수·유승민 등과 절연했다. 대선을 승리로 이끈 ‘보수 빅텐트’를 해체해 버린 것이다. 한동훈 대표와도 끊임없이 갈등 빚으며 적대적 관계를 형성했다. 정권의 존립 기반인 보수의 외연을 좁히고 스스로를 고립으로 몰았다.

윤 대통령은 보수 주류층까지 등을 돌리게 하고 있다. 김건희 여사 문제 때문이다. 공적 권한 없는 김 여사가 국정과 인사, 심지어 여당 공천과 당무(黨務)까지 관여한다는 의혹이 꼬리 물고 있다. 추석 전 현장 방문에서 김 여사가 제복 공무원들을 세워놓고 “미흡한 점이 많다””개선이 필요하다”며 지시조(調) 발언을 쏟아낸 장면이 상징적이었다.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이 보수의 선공후사(先公後私) 철학이다. 김 여사의 월권을 수수방관 방치하는 윤 대통령의 태도를 보수층은 도무지 납득하기 힘들다.

김 여사 이슈는 보수의 마지막 보루인 법치의 가치마저 흔들고 있다. 왜 대통령 부인은 명품백을 받아도 처벌받지 않는지, 주가조작 의혹으로 고발돼도 4년 넘게 수사가 뭉개지는지, 검찰에 소환돼도 경호처 부속 건물에서 특혜성 조사를 받는지, 설명이 궁색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보수층이 이재명의 온갖 범죄 혐의에 혀를 차다가도 “김 여사는?”이란 반박을 받으면 말문 막힐 때가 많다.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만든 지지자들로선 속된 말로 ‘X팔리는’ 심정이 된 것이다.

지지 기반이 무너지는 비상 상황에서도 윤 대통령은 현실을 보려 하지 않는다. 지난 총선 때, 참패 위기 앞에서도 김 여사를 감싸고 한동훈을 내치면서 선거를 엉망으로 망친 것을 보수층은 기억하고 있다. 하도 기가 막혀 윤 대통령이 보수를 망치려 작정한 ‘X맨’ 아니냐는 한탄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윤 대통령의 곤경은 야당과 협력을 안 한 탓이라고들 한다. 맞는 말이나 협치(協治)를 논하기 앞서 보수의 기본을 다지는 일부터 윤 대통령은 실패했다. 개혁의 이상만 앞세워 문제 해결을 도외시하고, 사(私)를 앞세워 법적 공정성을 흔들고, 내 편 삼아야 할 우군을 적으로 돌리는 자해 정치로 보수 진영의 마음을 잃었다. 그래 놓고 문재인 정권 인물을 총리로 영입한다, 비서실장에 기용한다 하며 엉뚱한 헛발질을 했다. 문 전 대통령의 핵심 혐의는 수사하지 않고 봐준다는 지적도 받았다. 문제의 본질이 무언지 모르는 듯하다.

지난주 한국갤럽 조사에서 자신이 보수라는 사람 중 윤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53%로, ‘지지한다’ 38%를 압도했다. 보수층조차 윤 정권의 실체에 실망하고 있다는 뜻이다. 윤 대통령이 보수의 정체성을 의심받을 때 어떤 비극적 상황이 벌어질지 상상만으로도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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