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5호선 세종문화회관역 6번 출입구 에스컬레이터는 오늘도 ‘수리 중(修理中)’이다. 벌써 3일째다. 공사를 하는 젊은 엔지니어에게 물으니 ‘베어링이 비에 젖어 녹슬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22계단밖에 안 되는 짧은 에스컬레이터라서 큰 불편은 없다. 일 년에 예닐곱 번 고장이 난다. 한번 고장 나면 한 달가량 방치하다 수리팀이 나와 하루나 이틀 걸려 고쳐 놓으면 한 닷새 돌아가다 다시 멈춰 선다. 10년째 이런 상태다. 한국이 어쩌다 이런 나라가 됐을까.
과거엔 무심코 지나쳤던 사소한 일이 언제부턴가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무슨 ‘징조’나 ‘조짐’이 아닐까 하는 겁부터 난다. ‘징조’나 ‘조짐’은 객관적 근거 없이 괜히 잘될 것 같은, 혹은 안될 것 같은 느낌을 말한다. 여기선 물론 후자(後者)다. 버티고 견디면 결국 잘 풀리더라는 나라의 장래에 대한 체험적 낙관론이 흔들린 것이다. ‘자신감’이 들어섰던 자리를 ‘불안감’이 차지했다.
‘쇠퇴(衰退) 강박증’은 서울에 사는 기자만 앓는 ‘외로운 병’이 아니었다. 미국 수도 워싱턴 근교에서도 ‘쇠퇴 강박증’은 흔한 병이었다. 뉴욕타임스 어느 기자는 워싱턴 밖 베데스다(Bethesda)역에서 전철로 워싱턴으로 출퇴근했다. 그 역에는 21계단의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와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돼 있었다. 하나가 고장 나면 옆 에스컬레이터도 세워 오르고 내리는 계단으로 이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는 고장 난 에스컬레이터를 걸어서 올라 중국 톈진으로 출장을 갔다. 거기서 두 번 놀랐다. 회의장인 컨벤션센터의 규모에 먼저 질렸다. 건평이 23만㎡(6만9000평)였다. 다음에는 ‘2009년 9월 15일 착공 2010년 5월 완공’이란 표지판을 보고 또 놀랐다. 출장에서 돌아와 보니 21계단짜리 에스컬레이터는 아직도 ‘수리 중’이었다. 중국에선 7만 평 컨벤션센터를 32주 만에 완공하는데 미국에선 21계단 에스컬레이터를 수리하는 데 24주가 걸리다니…. 이런 탄식을 녹여 정치학 교수 친구와 함께 ‘한때는 미국이 그랬는데…(That used to be us)’라는 책을 썼다.
‘속도’만큼 중요한 것이 ‘방향’이다. 며칠 전 일본 신문에 실린 ‘사양(斜陽)길 경제 대국’이란 기사는 일본의 반성문이었다. 1992년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방문에 앞서 일본 정부는 여러 부처가 나서서 미국을 달랠 선물 꾸러미를 준비했다. 그 핵심이 ‘일본 기업의 미국 기업 기술 지원’이었다. 당시는 ‘해가 지지 않는 반도체 왕국’ 일본에 대한 찬사가 요란했던 시절이다. 그 박수는 일본이 ‘과거’에 흘린 땀과 노력에 대한 박수였다. 그걸 일본은 ‘현재’에 대한 평가로 오해했다는 것이다. 그때 이미 세계 반도체 산업은 크게 방향을 틀었고 제때 그 흐름에 올라타지 못한 일본 반도체 왕국은 무너졌다.
두 나라 반성은 속도의 나라 중국을 본받자는 것이 아니다. 한때 자기 나라를 세계 ‘No. 1′ ‘No. 2′로 올려놓았던 ‘성공 방정식’을 되살려야 한다는 뜻이다. 미래를 위한 투자를 늘리자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받는 연금은 줄이고 돈은 더 내자는 대목에 이르면 고개를 돌리는 건 어느 국민이나 똑같다. 그런 노령(老齡) 유권자 숫자는 해가 갈수록 증가한다. 그래서 한번 무너진 성공 방정식은 다시 세우기 힘들다.
일본 GDP는 1990년부터 2023년 사이에 30% 증가했다. 그 사이 복지 지출은 300% 증가했다. 노령화의 속도가 예상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노령화 속도는 일본보다 훨씬 가파르다. 일본의 현재 모습에 더 어둡게 덧칠을 하면 10년, 20년 후 한국 모습이 된다.
‘세계는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 ‘바뀐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우리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잊는 나라는 반드시 뼈저린 대가(代價)를 치른다. 우리는 두 질문을 잊고 산 지 오래다. 서울 복판에서 10년째 ‘고장’과 ‘수리’를 반복하는 에스컬레이터가 무슨 징조나 조짐처럼 보여 섬뜩할 정도다.
전쟁의 화약고(火藥庫)를 끼고 사는 대한민국 최대 현안이 대통령 부인 문제라는 게 말이 되는가. 이제 막 걸음마를 떼는 정치 초보 여당 대표를 나무랄 일이 아니다. 사법 처리를 피하기 위해 오로지 대통령 탄핵에 골몰하는 야당 대표를 쳐다볼 것도 없다. ‘모든 책임은 여기에 있다’는 대통령 책상 위 명패를 따라야 한다. 그 말의 주인공 트루먼 대통령 전기는 ‘트루먼은 일생 동안 아랫사람에게 격노(激怒)한 적이 없다’고 했다. 부인 문제를 푸는 첫걸음도 거기서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