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군이 ‘벙커버스터’로 불리는 초대형 폭탄 등을 대거 퍼부어 헤즈볼라 지하벙커를 공격한 장면.

이스라엘이 지난주 레바논에 폭탄을 퍼부었다. 반(反)이스라엘 무장 단체 헤즈볼라 지도부를 제거하겠다고 수도 베이루트를 폭격했다. 한 주 전엔 레바논에서 무선호출기·무전기를 동시다발적으로 원격 폭발시켜 사상자 수천 명이 발생했다. 옆 나라가 공격하는데 레바논 정부 모습이 안 보인다. 그 흔한 ‘보복 천명’ 성명서 하나 안 낸다. 이유는 간단하다. 레바논 정부가 마비된 지 오래기 때문이다.

1940년대까지 프랑스 식민지였던 레바논은 기독교와 이슬람 신자가 섞여 살아 독립 후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잦은 내전으로 나라가 거덜나자 국제사회의 중재로 독특한 정치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른바 ‘종파 간 삼권분립’이다. 통상적인 입법·사법·행정부가 아니라 기독교, 이슬람 수니파, 이슬람 시아파가 대통령·총리·국회의장을 나눠 맡기로 했다. ‘트로이카’라 불리는 세 지도자에겐 모두 거부권이 있다. 국회 의석 또한 세 종파가 미리 정해진 비율로 나눠 갖는다. 유혈 분쟁 하지 말고, 행정부·입법부의 권력을 공평하게 배분하자는 취지였다.

현실은 이상(理想)과 다르게 갔다. 협치는커녕 각 종파가 ‘각자도생’에만 힘쓰고 있다. ‘파이 조각’ 비율이 정해진 판에, 유권자 마음을 얻으려 노력할 동기도 없다. 세계은행은 2016년 보고서에 “세 세력은 최소공배수를 찾아가듯, (국민이 아닌) 각자의 손익만 계산해 법안을 통과시키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러다 보니 통과시킨 법 수가 한 자릿수인 해가 대부분이다.

정권에 발을 들인 정치인들은 자기 배 불리는 데만 전념해 왔다. 여러 국제기구가 반복해 권고해온 금융실명제처럼, 정권의 축재(蓄財)를 방해하는 제도는 의회·정부 모두 묵살한다. 레바논 중앙은행은 2016~2019년 달러 자산을 맡기면 연 10%라는 높은 이자를 지급해 글로벌 자금을 빨아들인 적이 있다. 이는 다른 예금자의 돈으로 이자를 지급한 국가 차원의 ‘폰지 사기’로 드러났고 여느 폰지 사기의 말로처럼, 레바논은 자금 유입이 한 번 끊기자 이자를 지급하지 못하고 파산했다. 레바논 정권이 이 같은 국가적 자해(自害)를 용인한 이유가 무엇일까. 세계은행은 “기득권층도 달러 사다가 재미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레바논은 2019년까지 1인당 GDP가 1만달러에 육박하며 중동의 ‘경제 유망주’로 여겨졌다. 하지만 경제 성장의 실체가 드러나고 국가가 파산한 후인 2020·2021년 GDP가 25%, 10%씩 급감했고 이후에도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 돌파구가 없지는 않다. 레바논 연안엔 적잖은 원유가 매장돼, 개발하면 괜찮은 수익이 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자기 종파에 유리한 개발사를 저마다 미는 탓에 10년 넘게 개발 허가권 승인이 안 나는 판이다.

4년 전 발생한 베이루트항(港) 창고 폭발 참사는 레바논을 침몰시킨 결정타였다. 위험 물질인 질산암모늄 2750t이 창고에서 폭발해 2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폭발의 원인이었던 질산암모늄은 몰도바 국적 선박이 2013년 항만 사용료를 내지 못해 압류당한 후 7년 동안 방치된 것이다. 항만청·세관은 최소 여섯 차례 “위험하다”고 정부에 처리를 요청했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처리 비용을 댈 돈도, ‘국민의 안전’을 신경 쓰는 책임자도 없었던 탓이다.

이란의 지원을 받은 무장 단체 헤즈볼라는 시스템이 고장난 레바논을 숙주 삼아 성장했다. 이들을 소탕한다며 이스라엘이 쏟아내는 폭탄을 보면서, 많은 레바논 국민은 도움을 청할 곳도 모른 채 길바닥에 나앉아 있다. 세계은행은 이런 레바논의 상태를 ‘정치 기득권이 일반 국민을 해친 의도적 침체’라고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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