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무렵 스티브 잡스 애플 CEO는 인텔의 폴 오텔리니 CEO에게 모바일 폰을 위한 반도체 칩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잡스는 컴퓨터와 휴대폰을 결합한 신제품을 내놓으려 하는데 그 목적에 맞는 강력한 칩이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인텔은 잡스의 제안을 거절했다. PC용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을 독점해 돈을 쓸어 담고 있던 인텔은 아이폰을 틈새 시장용으로 봤다. 화가 난 잡스는 삼성전자에 아이폰의 칩 제작을 의뢰했지만 스마트폰 시장에서 경쟁하는 삼성과의 동행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결국 대만 TSMC가 애플 칩 제조 물량을 모두 가져갔다. 애플은 현재 TSMC의 최대 고객으로 연간 주문량이 25조원을 넘는다. 인텔의 거절이 참담한 오판으로 판명 난 셈이다. MBA(경영학 석사) 출신인 폴 오텔리니는 훗날 한 인터뷰에서 “그때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모바일 칩 시장이 100배 이상 커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고 술회했다.
이보다 더 참담한 오판도 있다. 반도체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네덜란드 장비 업체 ASML에 대해 들어봤을 것이다. 이 회사는 진공 상태에서 주석 방울에 레이저를 쏘아 생성한 극자외선(EUV·Extreme Ultra Violet)을 이용해 웨이퍼(반도체 원판)에 초미세 회로를 새겨 넣는 장비를 만드는 세계 유일 기업이다. 반도체는 회로 선폭이 좁을수록 정보 처리 속도가 빨라지고 에너지 소모와 발열도 줄어드는데, 회로 선폭 7나노(10억분의 1)미터 이하 공정에서는 ASML의 EUV 장비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 기술은 원래 미국 정부 연구소와 인텔이 1990년대 초부터 개발해 온 것이다. 인텔은 R&D(연구·개발)에 수십억달러를 쓴 데 이어 2012년엔 ASML에 41억달러(약 5조4000억원)를 투자해 줬다. 그런데 정작 2018년 처음 출시된 EUV 장비를 채택한 곳은 인텔이 아닌 대만 TSMC였다. 인텔은 값비싼 EUV 장비가 경제성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무렵부터 두 기업의 운명은 극명하게 엇갈린다. TSMC는 EUV 도입과 함께 공정 기술에서 인텔을 앞지르기 시작했고 인텔은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재무·회계를 절대시하는 ‘빈 카운터(bean counter·콩 세는 사람)’ 경영진이 비용 절감을 위해 R&D 인력을 대거 해고한 것도 뼈아픈 실책이었다. 해고된 R&D 인력이 줄줄이 경쟁사로 옮겨 인텔과의 기술 격차를 단숨에 따라잡았고, 인텔은 힘의 원천인 기술 리더십을 잃어버렸다.
미국 정부도 미국의 기술과 자본으로 완성된 EUV 장비로 생산된 첨단 반도체가 중국 정부의 스파이 기업으로 의심되는 화웨이의 스마트폰에 탑재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화들짝 놀랐다. 충격받은 바이든 정부가 중국에 대한 수출 통제와 함께 칩스법(CHIPS Act)까지 만들어 노골적으로 인텔을 밀어주고 있지만, 선수로 뛰어야 할 기업 스스로의 경쟁력이 망가져 버리면 미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도 성공할 수 없다.
인텔과 함께 한 세대를 구가했던 삼성전자는 어떤가? 달러 기준 삼성전자 반도체 매출 추이를 보면 인텔과 마찬가지로 2018년 정점(頂點)을 찍은 뒤 하락세에 접어들었다. 스마트폰의 저장 장치로 쓰이는 낸드플래시 같은 히트 제품이 나온 지 오래이며, 새 성장 동력으로 꼽은 파운드리도 TSMC의 집중 견제로 점유율이 오히려 하락했다. “삼성만 잘나가느냐”는 질시(嫉視)가 채 10년도 안 돼 “요즘 삼성 괜찮냐”는 우려로 바뀌었다.
1990년대 인텔의 전성기를 연 앤디 그로브는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베스트셀러가 된 같은 제목의 저서에서는 “비즈니스의 근간이 변하는 ‘전략적 변곡점’에 주의하지 않으면 회복할 수 없는 치명상을 입는다”고 했다. 스티브 잡스의 자서전에도 오로지 최고의 제품을 만들겠다는 편집광 CEO와 직원들이 계급장 떼고 싸우는 일화가 넘쳐난다. 삼성에 그런 DNA가 아직 살아있는지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