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낙 전면에 등장하는 걸 꺼리는 만큼 조심스럽지만, 한번쯤은 그의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윤식 교수의 아내 가정혜 여사 이야기다.

사흘 뒤 25일은 김윤식(1936~2018) 서울대 명예교수의 기일이다. 벌써 6주기. 동사 ‘읽다’와 ‘쓰다’의 주어라는 비유처럼 평생을 읽고 쓰고 가르쳤던 문학평론가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언론은 유족의 기부 소식도 함께 전했다. 교수 월급과 원고료로 모은 재산 30억원을 새로 짓는 국립한국문학관에 내놨다는 소식이었다. “유족이 기부했다”고 기사는 표현했지만, 남은 가족이라고 해 봐야 두 살 아래 가정혜(86) 여사가 전부. 평생 자식도 없이 읽고 썼던 삶이었다.

하나 더. 10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서울대 규장각에서는 ‘혼신의 글쓰기-김윤식의 한국현대문학사’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김 교수의 저서, 육필 원고와 강의 노트, 사진·편지·메모, 그리고 재현한 서재 등을 만날 수 있다. 100여 쪽 분량의 전시 도록에는 마지막 페이지에 작은 글씨로 이름 하나가 적혀 있다. ‘전시총괄 가정혜’. 개막식 행사에 서울대 유홍림 총장과 국립한국문학관 문정희 관장, 정긍식 규장각한국학연구원장 등 여러 사람이 축사를 했지만, 그는 마지막에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하객들에게 인사를 꾸벅했을 뿐이었다.

칠순에도 열정적인 문정희 시인이 그날 웃으며 했던 말이 있다. 외출하지 않는 남자의 뒷바라지가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고. 서울대 교수와 덕성여대 교수로 각각 부임하기 전, 청년 김윤식과 가정혜는 고등학교 교사로 먼저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같은 날 같은 고등학교로 발령받으며 처음 만난 인연이라고 했다. 두 사람의 결혼은 1965년. 53년을 함께 살았던 삶이다. 한국 근대문학의 무엇을 연구하든 결국은 김윤식을 만나게 된다는 말이 있다. 단독 저서만 151권에 달하는 남편은 한국 지성사에서 유례없는 다산의 상징. 아내는 남편을 “목숨 걸고 쓰는 사람”으로 기억했다. 연구자에게는 상찬이겠지만, 삼시세끼를 아내에게 의존하며 서재를 떠나지 않는 남편을 떠올려 보라.

김윤식 교수. 그는 책상 뒤 메모판뿐만 아니라 꽂혀 있는 책에도 스카치테이프와 압정을 이용해 60~70여개의 메모들을 붙여놨다. /이덕훈 기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다. 선생의 말년. 중환자실에서 사투를 벌이던 남편을 위해, 아내 역시 함께 싸웠다. 바로 옆 보호자 대기실. 100일 넘게 그 방을 홀로 지켰다고 했다. 밤의 대기실은 무서웠다. 의사가 급하게 뛰어오고, 옆 자리 보호자가 눈물투성이가 되어 불려간다. 하룻밤에도 그렇게 네댓 명이 세상을 떠났다. 학자에게는 제자가 곧 자식이라던가. 임종을 준비하라는 통보를 받은 아내는 제자들에게 연락을 했고, 그렇게 적지 않은 이들이 스승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제자들의 임종이 남편을 위해 준비한 사적 의례였다면, 학자 김윤식을 위해 아내가 바친 공적 경의(敬意)가 있다. 이번 전시의 공식 초대장 이미지는 김윤식 저서들의 책 표지 콜라주다. 얼핏 보면 151권의 단순 나열이지만, 사실은 그 안에 경중(輕重)이 있다. 책마다 넓이와 두께를 조금씩 달리한 것. 생전의 남편에게 한 권 한 권을 호명하면서 그 비중의 크고 낮음을 물었다고 한다. ‘한국근대문예비평사’와 ‘이광수와 그의 시대’ ‘김동인 연구’ ‘내가 읽고 만난 일본’ 등을 중심에 놓고, 이번 책은 그 앞이냐 뒤냐는 식으로.

남녀평등이 시대정신인 시대, 누군가는 이 커튼 뒤 내조를 시대착오로 부를지도 모르겠다. 동의하지 않는다. 시대와 상관없이, 남녀와 무관하게, 평생을 사랑하고 존중했던 배우자를 기리는 어떤 모범이 그 안에 있다.

사람은 두 번 죽는다고 한다. 한 번은 육체적 죽음, 그리고 또 한 번은 그가 떠났다는 사실조차 잊혔을 때다. 이를 막아보려는 어떤 노력을, 여기 기록한다.

아내 가정혜 여사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