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윤석열 검찰총장이 조국 가족의 입시 비리와 사모펀드를 수사할 때였다. 당시 집권층에선 사람을 보내 윤 총장에게 “굳이 이렇게 분란을 만들 필요가 있느냐”며 수사 중단을 권했다. 그때 윤 총장이 내세운 수사 불가피 사유는 두 가지였다. 이 사건을 묵과할 경우 후배 검사들이 나부터 가만두지 않을 것, 또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해가 되고 결국 정권 교체로 이어질 것이라는 논리였다고 한다. 문 정부 측 인사들은 “윤 대통령은 조국 문제로 정권이 교체되면 자신도 위험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결국 문재인 정권은 윤 총장을 탄압했고, 역설적이게도 윤 총장 본인이 정권 교체의 주역이 됐다. 야권 관계자는 “윤 대통령의 고집과 자기방어 본능이 합쳐진 결과”라고 말했다.
검찰총장 윤석열은 그때 “이러다 정권 교체된다”며 신속히 수사를 진행했다. 그러나 김건희 여사 문제 앞에서 대통령은 조국 사태 때 같은 절박함과 단호함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오히려 보수층이 “이러다 정권 교체된다” 수준을 넘어 “이러다 대통령이 또 탄핵당할 수 있다”며 노심초사하고 있다. 지난 대선 때 윤 대통령을 지지했던 상당수가 비판층으로 돌아섰지만, 이번 재보궐 선거를 통해 이들의 복잡한 속내가 드러났다.
부산 금정구청장 선거에서 국민의힘 후보는 61%로, 39%를 득표한 민주당 후보에게 22%포인트 앞섰다. 원래 금정이 보수세가 강한 곳이라지만 2018년 지방선거 때 이곳에선 민주당이 10%포인트 차이로 승리했다. 깃발만 꽂으면 되는 그런 곳이 아니다. 지난 18일 발표된 한국갤럽 조사에서 부산·경남의 대통령 지지율은 26%로, 전국 22%와 다르지 않다. 윤 대통령과 대립해온 한동훈 대표 효과라고 볼 수도 없다. 부산·경남 국민의힘 지지율은 30%로, 민주당 36%, 조국혁신당 6%에 뒤진다. 민주당 후보는 야권 단일 후보였다. 그런데도 국민의힘은 압승했다.
대통령 지지율의 2.3배, 여당 지지율의 2배 득표라는 미스터리를 풀어줄 단서는 2022년 대선에 있었다. 그때 금정에서 윤 대통령은 61%, 이재명 대표는 36%를 득표했다. 차이는 25%포인트였다. 2년 반 전 윤 대통령을 지지했던 금정 유권자들이 이번에 그대로 국민의힘 후보에게 투표한 것이다. 정치권 관계자는 “야권의 조기 탄핵 공세에 위기감을 느낀 보수층이 방어 모드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민주당이 윤 대통령에 대한 실망이 이재명 대표 지지로 이어질 것으로 보고 조기 탄핵 공세에 나섰지만 그건 오판이었다. 오히려 보수층은 민주당이 김 여사 문제로 정권 퇴진 공세에 나서자 잔뜩 몸을 웅크렸다. 내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두 번이나 탄핵으로 물러나게 할 수 없다는 자존심도 작용했다.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보다 앞선 건 보수 자멸의 역사를 반복할 수 없다는 절박함이었다.
그제 윤 대통령과 한 대표의 회동에서 놀란 건 ‘빈손 회동’ 그 자체가 아니다. 정원 산책 때는 김 여사 라인으로 지목된 참모가 대통령 옆에서 걸었다. 회동도 대통령의 외교 일정을 이유로 24분 늦게 시작했다. 우연이라면 배려가 없고, 각본이라면 치밀했다. 보통 외교 회담에서 최선은 공동 브리핑, 중간은 각각 브리핑이다. 최악은 브리핑도 안 하는 것인데, 윤·한 회동이 그랬다. 윤 대통령은 다음날 “인적쇄신은 내용 보고 판단하겠다. 김 여사는 이미 대외활동을 자제하고 있다”며 수습에 나섰다.
결국 김 여사 문제를 풀지 못하면 보수층의 자존심도 상처를 입고, 방어의 성벽도 무너진다. 마지막 해법은 김 여사를 포함해 대통령과 한 대표의 3자 회동밖에 없다는 말까지 여의도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헌정 사상 첫 탄핵은 대통령의 대단한 불법 때문이 아니었다. 최순실이라는 인물과 대통령이 맺은 관계가 국민 자존심을 건드렸다. 명태균 같은 정체불명 인사들이 지금 그러고 있다. 재보선 민심은 자존심을 지키고 싶다며 절박한 SOS 신호를 용산에 보냈다. 읽고 무시했거나 아직 못 읽었거나, 아니면 읽을 생각이 없거나 셋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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