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 교포는 부자다’ ‘육영수 여사 시해범 문세광은 재일 교포였다’. 1970, 80년대 신문 사회면을 통해 본 재일 교포는 ‘돈줄’과 ‘빨갱이’ 그 사이 어디쯤에 있었다. TV에서 ‘방송인’ 정대세(40)를 봤다.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난 이 한국인은 2011년까지 북한 축구대표로 뛰다 우리 프로구단에 입단했다. 북한 문제로 그의 입국을 반대하는 이들도 적잖았다. 개인의 노력, 한국인과의 결혼, 운동선수에게 사상적 잣대를 대서는 안 된다는 국민적 합의가 소동을 잠재웠다.

축구 선수 은퇴 후 지상파와 종편, 유튜브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방송인' 정대세. 우리 사회는 '제2의 정대세'를 키워낼 수 있을까. /TV조선 생존왕 캡처

한국을 떠나 일본에 정착한 ‘재일 동포’는 약 80만명(일본출입국재류관리청), 이 중 일본귀화자가 36만명, 한국국적자는 43만명(한국주민번호가 없는 사람 26만명 포함), 조선적(무국적)자가 2만4000명이다. 교포들은 ‘100만~150만명’으로도 본다.

미국, 스페인, 수리남 등 세계 곳곳의 해외동포는 700만명이다. 이 중 구한말~일제강점기에 떠난 이들은 ‘유민(流民)’과 흡사하다. 가난해서, 독립운동하러, 징용으로 ‘비자발적’ 이유로 고향을 떠나 중국, 구소련, 일본에 정착했다.

특히 공산권 이주민의 삶은 비참했고, 최근 귀환한 이들을 ‘독립운동가 후손’이라며 마을 조성에 나선 지자체가 여럿이다. 강제 이주당한 ‘사할린 한인’에게는 특별법을 통해 국적도 바로 회복해줬다. 선진국 한국은 이제 ‘뿌리 뽑힌 자’와 그 후손을 우리 땅으로 부른다. ‘인구 절벽’의 대안이기도 하다. 어쩐 일인지 재일 교포에게는 손을 내밀지 않는다. 좌파는 ‘반일’ 정서 팔아먹느라, 우파는 ‘친북 교포’ 문제로 모른 척해왔다.

특히 일제강점기 떠났던 이들과 그 후손인 ‘주민번호 없는 재일(在日) 한국국적자 26만명’ 문제는 들여다볼수록 난감하다. 제국주의 유럽은 식민지 출신에게 국적을 줬지만 일본은 몇 년간 방치하다 ‘영주권’을 줬다. 1965년, 1991년에 두 나라 간 협정의 결과다. 이 조항이 훗날 ‘투명인간 한국인’을 양산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70년대 롯데호텔 설립 추진 회의를 진행 중인 생전 신격호 회장의 모습. "고국을 위해 외국인이 머물 호텔을 건설해달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거듭된 요청에 롯데가 손해를 각오하고 승낙했다고 당시 공무원들은 증언하고 있다. / 조선일보DB

한국 국적자인 재일동포(26만명)가 한국에서 살려면 ‘재외국민용’ 주민번호를 받아야 한다. 한국어를 못해도 입대하지만, 출산·양육비 현금지원, 주택 및 융자 혜택에서는 배제되고, 의료보험료도 비싸다. ‘불완전 한국인’이다. 재외국민에게 적용되는 포괄규정이 특수지위의 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재일동포는 재외국민참정권 배제(2007), 보육료 지원 배제(2018)에 대해 위헌소송을 제기해 모두 승소했지만, 차별감을 떨치지 못한다. 그들이 교사가 되는 걸 ‘법’이 막지는 않지만, 현실에서는 사범대 입학부터 막힌다. 만연하고 미묘한 ‘먼지 차별’이다. 그들은 “한국 국적을 지킨 죗값을 치른다” “일본인이라면 다문화 혜택이라도 받겠다”고 자조한다. 반대 주장도 있다. “한국 국적 부여는 과거에는 차별이었지만, 지금 한국 위상을 고려하면 ‘우대’로 보인다.” 한일 경제력이 역전되면, 그런 주장이 더 세질 것이다.

하지만 그들, ‘무임승차’하는 게 아니다. ‘한국의 경제발전과 재일 한국기업인의 역할’을 쓴 한국계 나가노 신이치로(永野愼一郞) 교수는 “1964년까지 재일자금 2569만달러(2009년 가치로 1억2000만달러)가 한국에 유입됐고, 조국 방문 시 갖고 간 ‘포켓 머니’도 상당하다”고 했다. ‘한강의 기적’ 시발점인 구로공단에는 일본의 전기전자, 화학, 비료, 금속 등 200개가 넘는 교포 기업이 들어왔다. 해방 후 재일교포가 보낸 엔화, 신격호 등 교포 기업가에 의한 한국 경제 기여가 약 ‘2000조원’이라는 주장도 있다. 최소한의 ‘이자’도 못 챙겨줬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