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짐승 차이는 생각만큼 크지 않다. 사람은 적은 실수를 통해 빨리 배우고 짐승은 더 많은 실수를 저지르며 더디게 배운다. 그러나 권력 주변 모습을 살피면 짐승은 더디게 배워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지만 사람은 빨리 배워도 똑같은 실수를 끊임없이 되풀이한다는 게 사실에 가까운 것 같다.

윤석열 대통령은 2022년 5월 10일 취임했다. 문재인 시대 5년을 견디고 버텨 맞은 ‘보수 대통령’이었다. 취임 이틀 후 기자의 글 당번 순서가 돌아왔다. 덕담(德談)으로 축하해주고 싶었다. 마음 한편에서 걱정이 고개를 들었다. 그때 김건희 여사는 역대 대통령 부인 가운데 ‘가장 위험한 퍼스트레이디’라는 말이 돌고 있었다. 대통령은 거북하겠지만 이 이야기만은 꼭 해주고 뭔가 다짐을 받아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통령이 피를 나눈 친족(親族)과 살을 나눈 인척(姻戚)에 관해서는 누구도 바른말을 하기 어렵다. 대통령이 불났다고 눈치챘을 때는 이미 큰불로 번져 손을 쓸 수 없다. 이런 일을 당한 대통령은 허리가 꺾여 다시는 위엄(威嚴)을 회복하지 못했다. 특별감찰관은 이 위험에서 대통령을 보호하는 제도이니 반드시 임명하기 바란다.’

글 제목은 ‘기대 반(半) 걱정 반(半)’으로 달았지만 마음은 ‘걱정 반 기대 반’이었다. 편집 책임자에게 부탁해 ‘친인척 비위 감시하는 청와대 특별감찰관 ‘꼭’ 임명하도록’이라는 작은 제목도 달았다. 이것은 기자만의 걱정이 아니라 당(黨) 안팎도 생각이 같았다. 며칠 후 청와대 관계자 이름으로 ‘대통령은 특별감찰관 임명 공약을 반드시 이행할 것’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그러나 ‘꿩 구워 먹은 소식’이었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대통령은 특별감찰관을 임명할 생각이 없고 제도를 폐지할 가능성이 크다는 뉴스가 대통령실에서 나왔다. 이유가 기막혔다. ‘현재 대통령실은 과거 청와대와 달라 측근 비리(非理)를 은폐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감찰관이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여론이 악화됐다. 그러자 ‘현행법에 규정돼 있으므로 임명할 것’이라며 불을 껐다.

특별감찰관을 둘러싸고 엎었다 뒤집었다 식의 엇갈린 뉴스가 나오는 배경에 대해선 두 가지 설명이 따랐다. 하나는 대통령이 부인 주변을 감찰관이 들여다보는 걸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대통령보다 힘센 실세(實勢)가 특별감찰관에 손을 내젓기 때문에 그 수족(手足)들이 폐지 뉴스를 일부러 흘린다는 말이었다. 두 말이 모두 사실이었다.

취임 1년을 한 달 앞둔 2023년 4월 무렵엔 부인 소문은 권력 주변 화제가 아니라 전국 뉴스였다. 무슨 미술관장, 무슨 박물관장에겐 ‘대통령 부인 임명’이란 꼬리표가 달렸다. 다들 이 상태론 총선에 이길 가망이 없다고 했다.

기자는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지면 레임덕 현상이 나타나고, 차기 정권을 야당에 빼앗기면 대통령과 부인은 감옥에 갈 것’이란 야당 의원의 악담(惡談)을 계기 삼아 ‘역린(逆鱗)’이란 제목의 칼럼을 썼다. 악담이지만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대통령 턱밑엔 비늘이 거꾸로 난 곳이 있다. 그걸 건드리면 대통령 비서는 자리를 잃는다. 대통령이 선배·원로(元老)로 모시는 사람에게 그 즉시 대통령 전화가 끊긴다. 세상은 수군거리는데 대통령 귀만 어둡다. 국민이 응원할 테니 국회를 재촉해 특별감찰관을 임명해야 한다.” 국민 응원을 업고 부인 뜻을 꺾어보라는 말이었다. 응답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1년이 흐르고 국민의힘은 총선에서 예상대로 대패(大敗)했다. 정치 초(初)짜 비상대책위원장은 지휘도 서툴고 공천 방식에도 문제가 많았다. 그러나 참패의 근본 원인은 대통령 부부였다. 대통령은 한 달 뒤 반성 기자회견에서 특별감찰관은 언급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기자는 ‘부인 연줄 비서관·행정관 ‘용산’ 밖으로 내보내라’는 칼럼을 썼다. 이땐 그 비서관·행정관 명단은 헌 뉴스가 돼 버렸다. 그런데도 당대표 면담에서 대통령은 그들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잘못했는지 써서 비서실장에게 전달하면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늙은 기자는 이렇게 김건희 여사에게 전패(全敗)했다. 젊은 기자들도 완패(完敗)했다.

국민의힘이 특별감찰관 문제로 의원 총회를 열어 당론(黨論)을 정한다고 한다. 산불에 바가지 들고 나선 격이다. ‘친윤’ ’친한’ 분류표를 보니 기자에게 부인 문제를 에둘러 쓰지 말고 매섭게 지적해달라던 의원 중 몇몇은 친윤(親尹)이었다. 선진 대한민국의 후진 정치다.


△매일 조선일보에 실린 칼럼 5개가 담긴 뉴스레터를 받아보세요. 세상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91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