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크리스마스 낮, 핀란드와 에스토니아를 연결하는 해저 송전선 ‘에스트링크2′에 흐르던 전기가 갑자기 뚝 끊겼다. 몇 시간 후 핀란드와 에스토니아, 독일 간 통신에도 장애가 발생했다. 해저 광케이블 4개가 절단된 것이다. 유조선 ‘이글 에스(Eagle S)’호가 송전선과 광케이블이 매립된 곳 부근을 지나갔다는 사실이 곧 확인됐다. 러시아의 원유 수출항 우스트루가에서 이날 오전 출항한 배였다. 핀란드는 이 배가 갈고리 닻으로 해저를 훑어 송전선과 케이블을 절단한 것으로 의심하고, 국경수비대를 동원해 나포했다. 핀란드 경찰이 승선해 수색한 결과, 배 안에서는 러시아의 정찰용 장비가 쏟아져 나왔다.
◇발트 해저 케이블, 14개월 새 3번 절단
이글 에스호에 대해 러시아는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핀란드 당국은 이 배가 러시아와 연관 있다고 보고 선원들을 사보타주(고의적 시설 파괴) 혐의로 억류해 수사 중이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미국과 유럽이 러시아 원유 거래를 제재하자, 핀란드 주변 발트해에는 거래가 금지된 러시아산 원유를 실은 ‘그림자 선단(shadow fleet)’이 늘었다. 비슷한 시기 러시아는 유럽에 대한 사이버 공격과 허위 정보 유포 같은 하이브리드 위협 수위도 높였다.
선박이 닻이나 어구로 해저 케이블을 절단하는 일은 드물지만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몇 년 사이 대만 부근에서 중국 선박이 해저 케이블을 끊어 놓는 일이 급증하면서 고의적이란 의구심이 커졌다. 그런데 최근 발트해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2023년 10월과 지난해 11월 중국과 연관된 화물선이 핀란드와 인접국 간의 해저 가스관과 통신용 광케이블을 절단했다. 닻을 일부러 해저면에 끌고 간 정황도 확인됐다.
이 때문에 지난해 11월 핀란드와 독일은 “유럽의 안보가 악의적 행위자들의 하이브리드 전쟁 위협을 받고 있다”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보리스 피스토리우스 독일 국방장관은 “아무도 이 케이블들이 사고로 끊어졌다고 믿지 않는다. 사보타주로 추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또 비슷한 사건이 발생하자, 핀란드가 수사의 칼을 빼든 것이다.
◇’전면적 방어‘에서 ‘포괄적 안보’로
러시아의 하이브리드 공격은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사이버 공격과 허위 정보 유포를 통한 심리전이 대표적이다. 아프리카·중동 출신 난민을 유럽국가로 밀어내는 것도 그중 하나다. 중립국이었던 핀란드가 2023년 나토에 가입하자, 러시아는 수천 명의 난민을 핀란드 국경으로 보냈다. 인구 550만여 명의 핀란드가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에 1억4600만여 명의 인구를 가진 러시아의 하이브리드 공격 최전선에 서게 됐다.
핀란드는 러시아와 인접한 1340㎞의 국경을 폐쇄하고, 러시아와의 연계가 의심되는 선박을 나포하는 등 단호한 대응을 이어가고 있다. 러시아인의 부동산 취득도 제한하고 있다. 2020년부터 유럽연합(EU)이나 유럽경제지역(EEA) 국가 이외의 외국인이 핀란드 내 부동산을 취득하려면 국방부의 사전 심사를 받도록 하는 허가제를 실시했고, 이를 통해 러시아와 연관된 부동산 거래를 다수 차단했다.
그 배경에는 사회 전체가 국가 안보에 총력을 다해야 한다는 ‘포괄적 안보’ 정책이 있다. 핀란드는 1939년 11월 소련의 침공을 받아 이듬해 3월까지 이른바 ‘겨울전쟁’을 치렀다. 영토의 일부를 빼앗기기는 했지만, 핀란드의 결사적 항전으로 소련군에서 핀란드군 사상자(약 7만명)의 4배가 넘는 30만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당시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이에 감명받아 “오직 핀란드만이 위기에 직면해서 자유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그 이후인 1940년대 핀란드는 사회 전체가 전쟁에 대비돼 있어야 한다는 ‘전면적 방어’ 개념을 확립했다. 유럽 국가 중에서는 드물게 만 18세 이상 남성에 대한 징병제를 유지해 왔다. 이는 전시의 경제 운용과 민간의 심리전 대비까지 국방의 일환으로 보는 ‘포괄적 안보’ 정책으로 발전했다. 2017년 기업과 비정부기구(NGO) 등을 안보에 참여시키는 ‘사회를 위한 안보 전략’이 수립됐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핀란드는 여기에 동맹 외교를 추가해 나토 가입에 이어 지난해 9월 미국과 방위협력 조약도 체결했다.
지난달 기자와 만난 미카엘 안텔 핀란드 외교부 정무부국장은 “우리는 항상 (러시아에 대해) 우려한다. 그러나 두렵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유럽에 항구적 평화가 온 것처럼 여겨지는 때에도 핀란드는 국방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며 “이것이 우리의 DNA”라고 했다.
◇방공호 5만여 개, 유사시 인구 87% 수용
핀란드의 민·관 합동 방위 개념은 상당히 구체적이다. 지난달 방문한 헬싱키 중심의 메리하카 민방위 방공시설에서는 시민들이 배구 등 다양한 운동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평소 스포츠 센터 겸 지하 주차장으로 사용되는 이 시설을 유사시 72시간 내에 시민을 수용하는 방공호로 탈바꿈할 준비도 갖춰져 있었다. 지하 30m의 기반암을 뚫어 만든 시설 입구엔 핵 공격을 견딜 수 있는 두꺼운 철문이 달려 있고, 인근 아파트 단지와 연결된 지하 통로도 있다. 전쟁 발발 시 어느 배관을 이용해 어디에 화장실을 설치할지 등의 세부 계획도 있고, 세면대와 간이 침대 2000개 등도 보관돼 있다.
이런 지하 방공호는 헬싱키에만 5500개, 핀란드 전국에 5만500개 있다. 전체 인구 550만여 명 중 87%인 480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다. 동행한 헬싱키시 구조센터의 안나 레흐티란타 공보관은 “핀란드인 대부분이 유사시 자신이 어느 방공시설로 대피해야 할지 알고 있다”고 했다.
국가 안보 문제에 대해 배우는 ‘국방 코스’도 핀란드의 특징적 정책이다. 공무원뿐만 아니라 정당인, 언론인, 기업인, 시민단체 관계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매년 15일간 진행되는 이 코스에 참여해 안보 문제를 토론하고 있다. 또 가짜 뉴스에 대한 시민들의 분별력을 키우기 위한 미디어 리터러시(매체 이해력) 교육도 2013년부터 정규 교육 과정에 편입했다.
“美, 태평양에 집중해야할 상황 올 수도··· 유럽이 간극 메워야”
지난달 헬싱키에서 기자와 만난 사울리 니니스퇴 전 핀란드 대통령은 “러시아는 어떤 의미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유럽에 대한 하이브리드 전쟁으로 확전시켰다”면서 “우리가 강하다는 사실을 보여줘야만 한다”고 했다. 그는 2012년부터 12년간 대통령직을 역임했다. 퇴임 후인 지난해 10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 특별고문 자격으로 유럽의 민·관 합동 대비태세 강화를 위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서 그는 “하이브리드 작전의 대가가 너무 크다는 결론을 내리게 해야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이라며 “단호한 대응”을 권고했다.
니니스퇴 전 대통령은 러시아의 ‘난민 밀어내기’ 공격에 대해 “민주주의 국가에는 모든 사람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된다는 이상이 있는데, 악의를 가진 사람이 이를 악용하려고 할 때 매우 어려운 문제가 생긴다”고 했다. 그는 “핀란드가 국경을 폐쇄할 때 망명 희망자를 거부하면 국제인권법 위반이란 주장도 있었다”며 “러시아는 이런 방식으로 정부를 공격해 정부의 대응 능력에 의문을 야기하는 동시에 그 국민들의 힘도 시험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기에 “하이브리드 전략에서 적성국들보다 한 수 앞서기 위해 유럽만이 아니라 모든 동맹·우방국이 함께 모든 정보와 수단을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군 병력뿐만 아니라 하이브리드 공격에 대응할 인력도 부족하다”며 “젊은이들이 이런 일을 하도록 인센티브를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이 방위비 인상을 요구하며 나토 탈퇴를 위협하는 데 대해 니니스퇴 전 대통령은 “그러리라 걱정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는 이와 무관하게 유럽의 국방력을 강화해야 한다며 “푸틴은 10여 년 전부터 서방이 약하다고 해왔다. 전쟁을 피하려면 우리가 강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했다. 또 “미국 민주당도 태평양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 태평양의 지정학적 상황이 악화되면 미국이 거기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사실은 명백하다”면서 “미국이 유럽과 태평양에 모두 집중할 수 있을지 의문이 있다. 그 간극을 메울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이브리드 공격(hybrid attack)
전통적 의미의 무력 사용은 아니지만 상대국의 취약점을 이용해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뤄지는 다양한 강압적, 체제 전복적 행위를 총칭한다. 여러 재래식, 비재래식 수단과 테러리즘, 불법행위가 동원되며 비국가 행위자에 의해 자행될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