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공수처 수사관들이 한남동 대통령 관저 검문소에 진입해 윤석열 대통령 체포 영장을 집행하려 하자 경호처 측 55경비단 병력이 수사관들을 둘러싸 저지하고 있다./뉴스1

계엄 후 정국에서 지금 벌어지는 일들을 늘 있던 ‘진영 대결’이라든지 ‘여야 충돌’ 정도로 여긴다면 상황을 오판하는 것이다. 한남동 거리에서, 광화문 광장에서, 여의도 국회에서, 적의(敵意)로 가득 찬 극한 대결의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 대통령 관저는 철조망 쳐진 도심 속 요새가 됐고, 유혈 충돌의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타협의 실마리라곤 보이지 않는다. 한쪽이 다른 쪽을 죽여야 끝날 듯한 심리적 살육전이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2019년 조국 사태 때도 진영 대치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권력 실세 한 사람을 둘러싼 국지적 충돌이었다. 2016년 탄핵 때는 박근혜 대통령이 수동적 자세를 취했고, 정치권도 탄핵 추진에 대체적 합의를 본 탓에 큰 충돌은 없었다. 지금은 윤석열 대통령 본인이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계엄이 “반국가 세력 척결”을 위한 정당한 권한 행사였다며 지지자들에게 항전 메시지까지 보내 격렬히 저항하고 있다.

여야는 전면전에 돌입했다. 야당은 완장 찬 점령군 행세를 하며 국가권력을 접수하려 하고, 여당은 ‘이재명 대권 플랜’에 멍석을 깔아줄 순 없다 하고 있다. 야당 입에서 “대통령 사형” “총 쏴서 체포” 같은 섬뜩한 말이 쏟아지고, 여당은 “그래도 이재명은 안 된다”며 반격하고 있다. 광장에서 대치 중인 진영 대결은 국가 정체성을 둘러싼 가치 전쟁으로 비화됐다. 서로를 “내란 세력” “반국가·종북 세력”이라고 공존 불가능한 대상으로 규정하며 척결을 외치고 있다. 총만 안 들었을 뿐 사실상의 내전(內戰)이 펼쳐졌다.

내전의 본질은 무(無)정부 상태다. 지금 국정이 그 언저리를 향해 가고 있다. 대통령 체포 영장을 둘러싼 혼란은 공권력의 중심이 무너진 현실을 드러냈다. 대통령은 영장에 불응하며 사법을 진영 대결의 영역으로 밀어냈다.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이 ‘정치’를 앞세운 공수처의 무리한 법 집행이었다. 공수처는 내란죄 수사권 논란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관할인 서울중앙지법을 피해 서부지법으로 ‘영장 쇼핑’에 나섰다. 판사는 압수·수색 예외 조항의 적용을 배제한다는 월권적 내용까지 영장에 포함시켜 기름을 끼얹었다.

대통령 관저에서 차벽을 사이에 두고 공수처와 경호처가 대치하는 일촉즉발 사태가 벌어졌다. 공수처가 경호처 간부들을 형사 입건하자, 윤 대통령 측은 공수처·경찰 수뇌부를 맞고발했다. 공수처가 경찰에 영장 집행을 떠넘기고 경찰은 거부하는 사달까지 벌어졌다. 국가기관끼리 서로 부딪치고 충돌하며 사법행정이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그 과정에서 민주당은 경찰·공수처를 사실상 지휘하며 수사를 정치로 오염시켰다.

헌정의 최후 보루인 헌법재판소도 도마 위에 올랐다. 이재명 대표 재판이 늘어지는 것과 대조적으로, 헌재는 윤 대통령 탄핵안 처리에서 ‘신속’을 ‘공정’에 앞세웠다. 주 2회씩 심리를 열겠다며 속도전을 선언했다. 헌재가 탄핵소추 사유에서 내란죄 부분을 빼겠다는 민주당 측 요구까지 받아들인다면 논란은 더욱 커질 것이다. 법치(法治)는 국가를 지탱하는 기본 뼈대인데 이조차 흔들릴 지경이 됐다. 법 해석과 집행이 진영으로 갈리고, 헌정 제도의 신뢰성마저 의문을 받고 있다.

지금의 내전적 상황은 윤 대통령이 격발했고 이재명의 민주당이 키웠다. 계엄과 수사 불응으로 폭탄을 던진 것이 윤 대통령이고, 대권 조급증에 ‘내란 몰이’를 치달으며 불확실성을 증폭시킨 것이 이 대표다. 윤 대통령 문제의 해결법은 상대적으로 단순하다. 헌재가 공정한 심리를 약속하고, 경찰이 내란 수사권을 회수받아 법대로 집행한다면 대통령도 거부할 명분이 없다.

무정부 상태도 불사하겠다는 민주당의 폭주가 훨씬 심각해 보인다. 권한대행을 맡자마자 총리를 탄핵소추하고, 온갖 곳에 ‘내란 부역자’ 딱지를 붙여대며 혼란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장관 5명을 탄핵해 국무회의를 마비시키겠다”거나 “(대통령 체포에) 관을 들고 나올 결기” 운운하며 유혈을 부추기는 발언마저 서슴지 않는다. 최상목 권한대행까지 내란 동조자로 몰아 고발했다. 이재명 대권 플랜을 위해서라면 경제가 망가져도, 위기가 찾아와도 상관없다는 그 무모함이 소름 끼친다.

기막힌 타이밍에 국내 개봉한 ‘시빌 워(Civil War)’는 미국에 내전이 벌어진다는 설정의 현실 고발 영화다. 2021년 의사당 점거 폭동에서 보듯, 두 쪽으로 쪼개진 미국의 분열상은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까지 왔다. 그러나 미국엔 견고한 자기 방어 시스템이 존재한다. 나라의 중심을 잡는 엘리트 그룹, 이른바 ‘어른들’이 있고, 위기 앞에서 정파를 초월하는 정치인들이 있으며, 신뢰받는 사법부가 있다. 이 시스템의 힘으로 극단적 분열을 막고 충돌을 피해온 것이 미국 민주주의의 250년 역사다.

한국엔 ‘어른들’도 없고, 정치는 정파성만 득세하며, 사법부 신뢰는 약하다. 그래서 지금의 내전 같은 혼란상이 어떤 결말을 맞을지 더욱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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