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엔 이제 내리막길만 남았다. 지금껏 한국은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을 답습하지 않을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지방에서 시작된 건설 침체, 역대 최악의 소비 위축에 따른 자영업자 100만명 폐업, 1%대 저성장과 해답 없는 저출생 등 모든 지표가 한국 경제가 가라앉고 있음을 가리킨다.

2024년 12월 26일 오후 부산항 신선대부두와 감만 부두 수출 선적을 기다리는 컨테이너들이 쌓여 있다. /김동환 기자

더 걱정스러운 것은 위기 때마다 경제 회복의 견인차 역할을 해온 제조업의 경쟁력 상실이다. 대표적으로 한국 3, 6위 수출품이자 산업화의 상징인 석유화학과 철강은 설립 50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았다. 석유화학의 경우 중국이 지난 5년 새 생산 능력을 한국의 4배 이상으로 키우면서 세계 최대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전환했다. 이로 인해 한국은 수출의 40%를 떠맡아 준 중국 시장을 통째로 잃는 것은 물론 중국의 저가 공세를 막아내는 데 급급한 처지가 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우디·쿠웨이트 등 중동 국가들도 중국과 손잡고 석유화학 육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동은 2030년까지 무려 120조원을 투자해 한국을 능가하는 생산 능력을 갖춘다는 계획이다.

원유(原油)에서 플라스틱과 합성섬유의 기초 소재를 뽑아내는 석유화학은 원유를 싸게 살수록, 설비가 새것일수록 무조건 유리하다. 다시 말해 서방 제재를 받는 러시아에서 국제 시세의 70% 이하로 원유를 수입하는 중국이나, 한국의 3분의 1 원가로 제품을 생산하는 중동 산유국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는 것이다. 철강 산업 역시 저성장으로 국내 수요가 매년 5%씩 줄어드는 상황에서 이젠 품질력까지 갖춘 중국산 제품들이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다.

한국의 마지막 자존심인 테크 분야에서도 불길한 조짐이 보인다. 로봇청소기 스타트업 로보락은 중국산을 ‘짝퉁’으로 여겼던 한국 소비자들의 높은 콧대를 낮췄다. 로보락 매출은 한국 진출 첫해인 2020년 291억원에서 5년 만에 10배로 급증했다. 이어 세계 1위 중국 전기차 BYD와 ‘중국의 애플’ 샤오미도 파격적인 가성비를 앞세워 본격적인 한국 시장 공략에 나선다. 로봇청소기와 TV로 이미 한국의 문턱을 넘었으니 앞으로는 더 쉬울 것이다. LG전자 조주완 사장은 최근 기자 간담회에서 “올해는 중국의 위협이 현실화된 단계이며, 고난의 한 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주력 산업의 쇠락과 함께 수출도 힘을 잃어간다. 작년 수출은 6838억달러(약 1002조원)를 달성, 2년 만에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하지만 그 사이 글로벌 물가 상승률이 두 자릿수를 훌쩍 넘었음을 감안하면 2억달러 차이의 신기록 경신은 빛이 바랜다. 곧 세계의 ‘차르’로 등극할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관세 폭탄에 대비한 밀어내기 수출이 없었다면 그마저도 힘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한국의 15대 수출품 중 2년 전보다 수출이 증가한 것은 반도체와 자동차·선박·일반 기계 등 4개뿐이다. 지난 10여 년간 15대 수출품에 변화가 거의 없다는 것도 답답한 대목이다. 미국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기업이 등장해 기존 강자를 제치고 신(新)산업을 일으키는 역동성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과연 스타트업에 호의적이지 않은, 경쟁 없는 대기업 체제로 AI 시대를 버틸 수 있을까 걱정이다.

이번 계엄 사태는 “기업은 2류, 정치는 4류”라는 이건희 삼성 회장의 명언(名言)을 다시 소환한다. 기업을 옥죄는 법안을 끊임없이 쏟아낸 야당, 변변한 경제 어젠다도 없이 엑스포 유치 등 실속 없는 이벤트에 기업의 역량을 소진시킨 여당 모두가 경제에는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증명했다. 정치인들은 아직도 사농공상(士農工商)에 절어 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다론 아제모을루 교수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어떤 일도 타협하지 못하는 두 정당이 한국 위기의 뿌리”라고 꼬집었는데, 이보다 정확한 진단이 없다. 이참에 정치와 경제 사이에 더 높이 담을 쌓자고 제안한다. 정부와 국회는 부(富)의 편법 상속이나 독과점 규제 등 제한적인 영역 외에는 모든 규제를 풀기 바란다. 정치가 경제에 부당하게 간섭하지 못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경제 위기 극복의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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