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7년 헌법 아래 치러진 8차례 대통령 선거 중 결과를 받고 허둥댄 것은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꺾은 2002년 선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3주 전 민주당 노 후보와 ‘국민통합 21’ 측 정몽준 후보는 단일화에 성공했다. 단일화 효과로 노무현이 이회창을 앞지른 순간, 그것도 투표 하루 전 밤 10시 정씨가 돌연 지지 철회를 발표했다. 정치적 ‘싱크홀’이었다. 노 후보는 정대철 선대 위원장과 함께 자정 무렵까지 정씨 집 앞을 지켰으나 끝내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 선거에서 노 후보는 48.9%를 득표해 46.6%를 얻은 이회창 후보를 57만 표 차이로 눌렀다.
기자 경험으론 빠르면 6개월 전, 늦어도 2~3개월 전엔 대선 당락(當落)이 정해졌다. 그 후 변화는 표차가 벌어지느냐 좁혀지느냐에 그쳤다. 신문이 전하는 ‘중도(中道)·무당(無黨)층이 변수’라는 등등의 말은 대부분 선거의 김을 빼지 않으려는 언론의 인위적 균형 시도였다. 총선 예측에선 헛짚기로 온갖 망신을 사는 여론조사도 정당과 후보가 오름세냐 내림세냐만 읽어도 되는 대선에선 어긋난 일이 없었다.
우리가 마주한 정치 현실은 ‘비현실적 현실’이다. 작년 12월 3일 이전 이재명 민주당 전 대표는 법정에서 ‘대표’가 아니라 ‘피고인’으로 불렸다. 8개 사건 12개 혐의로 5개의 재판에 불려 다녔다. 전과(前科) 기록도 4개나 됐다. 완행열차 기어가듯 굼벵이 걸음이었지만 재판은 한 걸음씩 종점을 향해 나갔다. 그는 모래가 구멍을 빠져나가는 걸 애간장 끓이며 지켜보던 모래시계 주인공 신세였다.
작년 12월 3일 밤 호박이 넝쿨째 굴러왔다. 비상계엄 선포였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마자 국회로 도피했던 그는 이걸 경계로 ‘여의도 대통령’에서 당선이 ‘가장 유력한 차기 대통령’으로 인생이 바뀌었다. 주한 미국 대사·일본 대사가 이 대표와 면담하며 한·미·일 공조(共助)를 역설하는 그의 말을 경청한다. 한·미·일 합동 군사훈련을 가리켜 ‘일본 자위대가 다시 한국에 진주할 날이 올 수 있다’던 그 사람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엊그제 발표한 집권 플랜도 ‘실용 정부’를 표방했던 이명박 대통령은 저리 가라 할 내용이다.
한국 정치는 파면당한 대통령과 이재명 전 대표의 합작품(合作品)이다. 전임 대통령은 어리석어서, 몰라서, 서툴러서, 잘못 알아서, 소견(所見)이 좁아서, 착각해서, 오만해서 여러 실책(失策)을 범했다. 그래도 실수로 불낸 실화범(失火犯)에 가깝다. 그가 불을 지른 것은 난데없이 비상계엄을 들고나온 작년 12월 3일 하루다.
이 전 대표는 지난 2년 기업을 옥죄는 법안, 국민을 공짜에 절도록 하는 법안, 주(週) 52시간 근무 강요로 반도체 연구실의 불을 끄는 법안, 창고에서 쌀이 썩어가는데도 무한정 쌀을 쌓아 쟁이는 법안 등 수십 개를 강행 통과시켰다. 국가를 마비시켜서라도 본인을 지키려고 작심(作心)했다. 실화(失火)가 아니라 방화(放火)였다. 방화는 실화보다 몇 배 중하게 처벌하는 것이 법이다.
그러나 한국 정치의 신상필벌(信賞必罰)과 인과응보(因果應報)는 두 공범(共犯) 중 ‘실화범’은 파면하고 ‘방화범’은 다음 대통령으로 점지하는 걸로 나타났다. 하늘[天]도 때론 이상한 소리를 낸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가리킬 것이다.
대통령 선거는 6월 3일이다. 52일 남았다. 국민의힘 출마 예상자 8명의 지지도를 모두 합해도 이 전 대표 지지도에 미치지 못한다. 기적을 바라야 한다. 그것도 여러 번의 기적이 필요하다.
노무현은 ‘김영삼 정당’에서 튕겨 나간 돌이었고 ‘김대중 정당’에선 굴러들어 온 돌이었다. 굴러들어 온 돌이 16차례 지방 순회 국민 경선을 통해 ‘김대중 당’의 후보가 됐다. ‘부산갈매기’는 김대중 당 본거지 광주에서 ‘김대중의 박힌 돌’ 한화갑을 꺾고 선거판을 뒤흔들었다. 국민의힘의 대구·경북은 김대중 당의 광주다. 대구·경북의 국민의힘 지지자들이 오로지 미래의 확장성(擴張性) 하나만 보고 굴러들어 온 돌을 뽑을 수 있을까.
노무현 오름세도 잠깐, 월드컵 붐을 탄 정몽준 돌풍에 휘청댔다. 여러 여론조사에서 정몽준이 노무현을 앞질렀다. 이 구도론 이회창에게 필패(必敗)였다. 노무현은 정몽준 요구대로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를 받아들였다. 노무현은 예상을 뒤엎고 여론조사에서 46.8% 대 42.2%로 승리했다.
국민의힘은 정말 기대하기 힘든 기적을 하나 더 바라야 한다. 전임 대통령이 국민의힘에 어떤 관심도 표시하지 않고 어떤 응원의 말도 보태주지 않는 것이다. 그게 가능하겠느냐고…. 그러니까 기적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