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협력 업체 만나는 것도 부담스럽습니다.” 요새 기술 유용 문제가 어떠냐고 물었다가 대기업 임원에게서 들은 말이다. 기술 유용 의혹이 불거지면 각종 조사에 시달리고 국감에 불려나가는 고초를 겪어 업계가 긴장 상태라고 손사래를 쳤다. 새로운 제품을 만들기 위해 한마음으로 노력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생기지도 않은 문제를 걱정하는 데 온 신경이 쏠린다는 말이다. 해외 업체와는 기술 A를 문의하면 A부터 E까지 얘기할 수 있다면서, 국내 기업보다 차라리 해외 기업과 손을 잡고 싶은 심정이라는 하소연이었다.

기술 탈취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이런 식이다. 대기업의 중소기업 기술 탈취가 업계에 만연해 있다. 중소기업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기술을 빼앗기고 문제를 제기해도 법 규정이 미비해 제대로 보상받기 어려운 구조다. 그래서 처벌을 강화하고 소송을 쉽게 하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은 기업 규제 이슈 전반에 동일하게 퍼져있다.

하지만 대기업의 중소기업 기술 탈취가 만연해 있다는 인식이 사실이 아니라면? 공정위 통계를 보면, 대기업이 기술 자료를 요구한 비율은 2017년 4.2%에서 2019년 0.7%로 급감했다. 대기업이 품질 검사 등 정상적인 이유로 기술 자료를 요구한 경우를 모두 포함한 수치다. 실제로 기술 자료를 유출하거나 유용한 비율은 2019년 현재 0.5% 수준이다. 오히려 중소기업 기술 탈취가 심각한 부분은 중소기업 간이다. 대중소기업농어업협력재단 조사에 따르면, 기술 유출 피해 유형 설문 문항에 대기업에서 기술 탈취를 당했다는 응답이 2016년과 2017년에는 없었다. 반면, 경쟁사로 기술 유출은 42%로 심각하다. 기술 탈취는 대기업보다 중소기업 간의 문제라는 것이다.

얼마 전 크게 이슈가 되었던 한화와 현대중공업 사례를 보자. 공정위는 한화가 하도급 업체의 태양광 전지 제조 라인 설비 기술을 빼앗아 자체 장비를 개발했다며 시정명령과 과징금을 부과했다. 하지만 하도급 업체가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 1심에서 서울중앙지법은 원고 패소 판결을, 공정위가 검찰에 제기한 형사 고소건도 혐의 없음으로 결론이 났다. 업체에서 받은 자료가 핵심 기술이 아닌 일반적인 것이어서 기술 탈취로 보는 것이 무리라는 게 재판부 설명이다. 현대중공업도 선박용 디젤 엔진의 피스톤 제조 업체를 다른 업체로 바꿨다가 기술 탈취 혐의를 받고 있다. 하지만 협력 업체 기술이 원청 업체의 원천 기술에서 온 것이라면? 복잡한 엔진 같은 제품은 단독으로 개별 부품만 설계하기 어려운 분야다. 다른 부품과 조립·구동 등 복잡한 요소를 고려한 엔진 전체의 종합 설계 기술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사건도 행정소송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공정위 사상 최대 과징금만 부각되고 원천 기술 소유권을 이유로 다툼이 진행 중이라는 건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현행 규정이 미흡하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이미 중소기업기술보호법, 부정경쟁방지법, 하도급법, 상생법 등에 기술 탈취 규제를 겹겹이 하고 있다. 중기부와 공정위의 중복 조사와 중복 처벌을 우려할 정도다. 일견 단순하고 명확해 보이는 대기업 기술 탈취도, 사정을 들여다보면 이렇다. 그런데도 상생법, 특허법, 하도급법 등 기술 탈취를 해결하겠다는 개정안이 줄을 선다. 이쯤 되면 대기업 기술 탈취 프레임은 현실과 동떨어진 인식을 바탕으로 규제 효과를 맹목적으로 믿는 미신과 다를 바가 없다. 물론 일부 기술 탈취가 명확히 입증된 사안에 대해서는 철저히 조사하고 처벌해야 한다. 다만, 맹목적 믿음에 의한 비판과 비난, 나아가 규제로 이어지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요즈음 상법, 공정거래법, 징벌적 배상제와 집단 소송법 등 각종 기업 규제 법안들이 쏟아지고 있다. 우리 기업들의 기초 체력이 몇 년간 계속 저하된 데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이중 삼중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도, 연내 입법이 추진 중이다. 하지만 어려울 때일수록 명분이나 프레임이 아닌, 사실과 통계에 기반을 둔 정책이 필요하다. 선한 의도에 맞는 결과를 담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칫 독소 조항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