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5일 서울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국민의힘 대선 후보로 선출된 윤석열 후보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덕훈 기자

우리나라의 보수는 폭삭 망했었다. 대통령에게 입바른 소리 한번 못 하고 떡고물만 바라보던 정치인들은 당의 대들보와 서까래가 무너지는 난리 통에서 제 몸들만 겨우 빼냈다. 의기양양한 민주당은 보수 궤멸과 20년 장기 집권을 호언장담했다.

그런데 불과 몇 년이 흐른 지금, 정권 교체 전망이 어둡지 않다. 국민의힘 전당대회가 한껏 고무된 분위기에서 치러진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간의 정당 혁신에 힘입어 국민의 기대가 높아졌기 때문이라는 자화자찬에는 걱정이 앞선다. 스스로의 한계와 과제를 짚어내지 못하는 정치 세력이라면 선거에서 이긴다 해도 국가의 미래를 밝힐 수 없다.

냉정하게 봤을 때, 지금 야권이 대권을 노릴 수 있게 된 것은 보수가 혁신적 대안 세력으로 우뚝 섰기 때문이 아니라, 청와대와 여당의 참담한 실패 덕분이다. 젊은 당대표 선출 등 신선한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한국 보수 정치의 정신이 뭔지 알겠다는 이는 찾기 어렵다. 미래 대비와 국가 개혁의 과제를 설계하고 책임지는 모습보다 어설픈 진보 따라 하기로 나라 곳간 허물기에 슬며시 끼어드는 장면이 더 익숙하다. 이번 경선 과정에서도 보수가 더 나은 미래를 가져올 것이란 기대보다는 저 모양이라도 민주당보단 낫지 않겠냐는 체념이 지배적이었다.

5년 전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이게 나라냐’를 외친 대상이 보수 정치 세력이었다는 것을 상기하면, 근본적 쇄신 없이 이들이 권력만 탈환했을 때 국민이 또 한번 절망하지 않을 수 있을지 비관적이다. 이 망국의 악순환을 끊으려면 정권 교체를 향한 국민 열망이 강한 바로 지금, 보수의 전면적 리부팅이 절실하다. 지적·도덕적으로 파산해버린 자칭 진보 세력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보수가 감당해야 할 역사적 사명이기도 하다. ‘(수단 방법 안 가리고) 합니다’라 떠벌리다 화천대유로 만신창이가 돼버린 여당 후보를 이기는 것만 유일한 목표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리부팅의 내용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우선 시대를 읽고 대처하는 유능함이다. 디지털 전환과 기후 대응, 미·중 관계의 변화 등 한반도를 둘러싼 변화가 숨 가쁘고, 경제력 격차와 고령화 등 내부의 어려움도 무겁다. 세계가 움직이는 방향과 발 디딘 현실을 명확히 인식하고 앞길을 뚫을 수 있을지에 국민 삶이 걸려 있다.

게다가 코로나 동안 풀린 유동성, 미뤄놨던 구조 개혁으로 수습하고 거둬들여야 할 것들이 한가득이라 다음 정권은 가시적 성과를 내기 어렵다. 그러니 뚜렷한 청사진으로 희망을 제시하되, 어려운 상황을 정직하게 털어놓고 고통스러운 개혁에 대한 공감을 얻어내야 한다.

둘째, 약자 배려와 격차 완화에 보수가 소극적이라는 통념을 불식할 진정성이다. 근래 보수 정권 10년이 가장 박한 평가를 받은 게 양극화 대처와 사회 통합이다. 사회 통합 실패는 정권의 실패뿐 아니라 극심한 포퓰리즘을 불러들여 민주주의 체제까지 위협하게 된다. 틈만 나면 국가 재정을 정권 유지 도구로 써먹는 여당을 비판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며, 국민 한 사람도 소외시키지 않겠다는 의지와 계획이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책임 정치를 향한 각오다. 사실, 여당 및 자칭 진보가 공적 가치와 책임을 내던지고 패거리 이익만 좇는 괴물이 된 데는 기득권 카르텔이라 불신받은 보수에 절반의 책임이 있다. 생계형 이익집단으로 전락한 진보가 법치를 농락하고 내로남불만 일삼다 몰락했다고 해서 보수가 미래를 열 리더십을 자동으로 갖추는 것이 아니다. 무책임 정치로 국민 신뢰를 잃고 무기력하게 권력을 갖다 바친 것이 바로 우리의 보수다. 지금 끝없이 추락하고 있는 여당이 한심하지만, 국민의 눈에는 기득권을 절대 내려놓는 법이 없고 망해도 책임지는 이가 없었다는 점에서 보수도 딱히 다르지 않다.

오랫동안 우리 국민은 믿고 존경을 보낼 정치를 갈망해왔다. 자신의 언행을 천금과 같이 여기는 정치인, 거짓이 드러나거나 정책이 실패하면 국민 앞에 책임을 지는 정치 세력이 이미 국민 눈높이다. 이것이 보수 정치의 뉴노멀이 돼 한국 정치 발전을 이끌어야 한다. 더구나 어차피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정치 세력이라면 현재와 같이 지축을 흔드는 환경 변화를 뚫고 국가를 번영으로 이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앞으로 넉 달의 대선 경주 동안 보수 정치가 스스로를 리부팅할 수 있을지가 나라의 운명을 가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