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19일 서울 동작구 국립현중원 현충관에서 열린 '이승만 전 대통령 서거57주기 추모식'에서 유족들이 분향을 하고 있다. 2022.7.19/뉴스1

흔히 이승만 대통령을 건국의 아버지라 부르며, 그의 가장 큰 공적을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한 안보의 확립으로 본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의 경제적 성과는 박정희 대통령의 고도성장 신화에 비유되면서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1948년부터 1960년까지 이승만 정부가 단행한 경제 및 사회정책의 성공이 없었다면, 60년대 이후의 고도성장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1948년 정부 수립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가장 먼저 단행한 정책은 농지개혁이었다. 대지주의 농지를 정부가 지가증권을 발행해서 구입하고, 이를 낮은 가격으로 소작농 및 소농들에게 판매한 것이다. 이를 통해 소작농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고 자작농이 획기적으로 증가하여 소득분배가 크게 개선되었다. 또한 일부 대지주들은 이때 받은 지가증권을 이용하여 근대산업에 투자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런 의미에서 농업자본의 산업자본화가 이루어졌다. 또 하나 중요한 개혁은 바로 교육개혁이다. 정부 수립 직후 빡빡한 재정상황에도 불구하고 교육과 문화는 정부의 재정지출 중 8%를 넘는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또한 6·25전쟁 중에도 교육에 대한 지원은 계속되었으며, 심지어 대학생의 경우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징집이 면제되는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또한 1954년부터 초등교육을 의무화하면서 교육의 혜택을 전 국민이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농지개혁과 교육개혁의 성공으로 소득분배가 개선되고 향후 산업화를 위한 인적자본이 형성되게 된 것이다. 동아시아의 경제발전을 연구한 미국의 로드릭 교수는 한국과 대만이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산업화 초기의 양호한 소득분배와 높은 교육 수준이라고 하였는데, 이 기반이 1950년대 이승만 정부에 의해서 구축된 것이었다.

해방 후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자산의 처분 즉 적산불하도 대부분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들 자산 중 사회간접자본 및 기간산업은 공기업으로 전환되었지만 나머지는 민간기업에 불하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시가보다 낮은 가격으로 민간에 불하되었으며, 이런 과정에서 특혜 시비가 발생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적산불하는 실보다 득이 많았던 정책이다. 우선 정부의 재정수입에 큰 도움을 주었으며, 주요 기업들을 민간에 불하함으로서 민간 기업에 기반한 자유시장경제의 확립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1953년 종전 이후 추진한 수입대체산업화 전략은 대한민국 산업화의 시작이었다. 이는 중요한 생필품을 수입에 의존하지 않고 국내생산으로 대체하자는 전략이며, 3白산업(설탕, 밀가루, 면방직) 육성을 시작으로 시멘트, 다이너마이트, 라디오 등 주요 공산품들의 국산화에 성공하게 된다. 이를 통해서 빠른 속도로 산업화가 진행되었으며, 이들 중 일부는 1960년대 이후 수출산업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특히 면방직 산업의 경우 50년대 말이 되면 이미 내수를 충족하고 생산 과잉 상태에 빠져 있었으며, 1961년 원화가치의 평가절하로 수출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자 적극적으로 수출에 나설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1950년대의 수입대체산업화 전략은 1960년대 수출진흥 정책의 초석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이승만 정부는 소득분배의 개선과 인적자본의 형성, 민간기업의 성장과 산업화의 초석을 다진 정부였으며 그 이면에는 자유시장경제를 신뢰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철학이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정치와 안보에서만 건국의 아버지가 아니라 경제에 있어서도 건국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들어 마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