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수 의료 분야에서 일하는 ‘바이털(생명) 의사’라는 표현은 사람을 살린다는 사명감과 자부심을 담고 있다. 비록 상대적으로 돈을 적게 받고 힘들지만, ‘바이털 의사’라는 호칭은 의사들 사이에서도 존경의 의미다. 하지만 소위 ‘하이 리스크, 로 리턴’으로 이들의 숫자가 줄었다. 이번 정부 발표를 보니, 의사를 많이 뽑으면 인기 분야 경쟁에서 밀린 의사들이 떠밀려서라도 바이털과를 선택하리라 기대하는 듯하다. 소위 낙수 효과다. 필수 의료 분야에 지원도 늘리고 법적 부담도 완화해 준다지만, 결국 핵심은 증원을 통한 낙수 효과인 것이다.
말은 참 무섭다. 내 주변에선 벌써 ‘낙수 의사’라는 자조가 시작됐다. 생명을 살린다는 ‘바이털 의사’가 국가 정책에 의해 ‘낙수 의사’로 전락한 셈이다.
바이털 의사들의 농담이 있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하지만 이번 정부 정책과 최근의 의료 환경은 바이털 의사들의 ‘가오’까지 빼앗고 있다.
치료 결과가 나쁘면, 곧바로 소송이 따라온다. 12억, 17억 등 민사상 배상금액이 매번 기록을 경신하는 데 이어, 형사소송까지 추가된다. 이제 사람을 살리려던 의사는 여차하면 과실치사로 실형을 받고 심지어 법정 구속도 당한다. 우리는 교도소 담장 위를 걷고 있는 것이다. ‘로 리턴’까지는 참을 수 있었지만 ‘하이 리스크’는 버틸 수 없다. 실제로 2017년 113.2%, 2018년 113.6%, 2019년 101.0%를 기록했던 소아과 레지던트 지원율은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사망 사건’ 이후, 2020년 78.5%, 2021년 37.3%, 2022년 27.3%, 2023년 15.9%로 급감했다.
지금 나오는 뉴스들을 보면 의대 증원의 숫자도 제각각이다. 연 500명, 1000명, 심지어 1000명 플러스 알파 이야기도 나온다. 하지만 정작 바이털과 의사 목소리를 정부는 듣고 있나. 의사들의 목소리는 제대로 듣지도 않은 채 졸속으로 추진하고 있지 않은가.
정부는 의사들의 분노에 놀란 듯, 지방병원·필수의료에 연 1조를 더 지원하고 의료분쟁 시 의료인 법적 부담 완화를 모색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정부는 바이털 의사의 가슴에 ‘가오’ 대신 ‘낙오’를 찍었다. 이런 정부 정책을 의사들이 신뢰할 수 있을까.
설령 ‘낙수 효과’로 ‘낙수 의사’가 만들어진다고 가정해 보자. 어쩌면 이게 더 중요한 대목이다. 자신이나 가족이 암에 걸렸을 때, 환자들은 누구에게 치료받기를 원할까. 경쟁에서 낙오되어 어쩔 수 없이 암 수술을 하는 ‘낙수 의사’일까, 아니면 최고의 실력에 사명감이 넘치는 ‘바이털(생명) 의사’일까.
언론이고 정부고 OECD 통계를 인용할 때는 항상 의사 수만 비교하지 정작 국민 1인당 연간 외래 이용률, 의료수가, 그리고 의료사고 관련 의사기소율은 언급하지 않는다. 2022년 통계에 따르면 2020년 우리나라 국민 1인당 외래 진료 횟수는 연간 14.7회로 OECD 평균 5.9회에 비해 2.5배 높지만, GDP 대비 의료비는 8.4%로 OECD 평균 9.7%보다 낮다. 이는 환자 1인당 의료수가가 OECD의 3분의 1밖에 안 된다는 의미다. 여기에 국내 의료사고 관련 기소율은 의사 1인당 독일의 6.7배, 일본의 42배라는 통계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의료인 법적 부담 완화와 단순 과실 책임 면제 같은 정부의 약속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을까. 의료수가가 OECD만큼 높아지고, 의료사고 관련 의사 기소율이 OECD만큼 낮아진다면, 피부미용 의사 대신 바이털 의사들이 넘쳐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