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 /뉴스1

7일 자 조선일보에서 김윤덕 기자가 “대법원 판결은 무죄지만 박유하 주장이 옳다는 건 아니다”라면서 나의 책 ‘제국의 위안부’를 비판했다. 골자는 동지애, 매춘적 강간을 주장했고, 피해자에 대한 혐오를 부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법원 판결은 다름 아닌 소송의 주장이기도 했던 그런 인식이 사실이 아니라는 판결이다. 김 기자는 판결문을 읽지 않고 판결에 대해 쓴 듯 하다.

무엇보다 나는 ‘동지애’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동지적 관계’ ‘동지적 측면’ ‘동지성’ 등의 단어를 사용했을 뿐이다. 그런 단어를 통해 환기시키려 했던 건 당시 조선은 일본과의 관계에서 중국이나 네덜란드처럼 적이 아니라 식민지였다는 사실이었다. 기존 운동이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 아닌 전쟁 상대로 프레임화한 탓에 위안부 문제 해결이 지연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국의 위안부’는, 조선인 위안부 문제를 90년대에 동유럽이나 아프리카에서 일어났던 부족간 강간케이스와 다르지 않은 ‘납치/강간=전쟁범죄’로 규정해 법적 책임을 물어 온 기존 학문과 운동의 문제를 지적하고, 대립 중이던 양극단을 비판하며 제3의길을 모색하자고 제안한 책이었다. 부제목을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으로 붙인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의 책에서의 ‘동지적 관계’란 그저 조선인 여성들이 적이 아니라 피식민지인으로서 ‘(제국)국가에 동원’당했다는 의미다. 동시에, 제국의 일원으로 동원되었으니 표면적으로 ‘동지적 관계’였지만 견고한 ‘차별감정’또한 존재했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소제목중 하나가 ‘군수품으로서의 동지’인 이유다. ‘동지적 관계’의 직시는 제국의 책임을 보다 명료하게 보여준다.

군수품으로서 동원돼 내일이면 죽을 지 모르는 이국땅의 엄혹한 상황 속에서도 일본군과의 심리적 연대는 존재했다. 나는 그 사실을 다름아닌 지원단체(정신대문제대책위원회)가 만든 증언집들을 통해 알았다. 행간에 살아 쉼쉬는 당사자들의 삶과 기억을 그저 ‘피범죄인의 심리’로 치부하며 ‘과도한 애착’이라는 차가운 진단을 내리도록 만드는 건, 역사에 이상을 투영하려는 욕망이자 엘리트 여성의 오만이다. “위안부는 일본군을 보살피는 존재(일본군 위안부, 또하나의 목소리)”라고 말했던 배춘희 할머니의 말을 김 기자는 아마 그저 세뇌된 이의 헛소리로 생각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폭력의 복잡성에 대한 무지가 낳은 그런 ‘인간에 대한 몰이해’(同칼럼 인용)쪽이, 당사자들에겐 더 잔인할 것이다.

매춘부라 주장하는 이들과 오직 강제연행이라 주장하는 양측에서 나는 같은 매춘혐오를 읽었다. 따라서 ‘제국의 위안부’에선 이른바 매춘 여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비난대상이 된 ‘자발적 매춘’은 인용이었고, ‘매춘적 강간’도 나는 위안부를 부정하는 이들을 비판하는 맥락속에서 사용했다. 그러니 “매춘을 목적으로 한 조선인 위안부도 적지 않았다고 (박유하가)강조”했다는 김 기자의 주장은 단순오독을 넘어 왜곡이고 음해다.

나는 그저 정대협이 만든 위안부증언집이 보여주는대로, 식민지로서의 구조적 강제성은 있었지만 이른바 강제연행은 일본군의 ‘공적’방침이 아니었다고 말했을 뿐이다. 간행이후 고발직전까지의 10개월동안 대부분의 언론이 호의적으로 받아주었던 건 나의 집필동기와 글의 함의를 있는 그대로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10년 이상 세월이 흐른 후 대법원판결 역시 ‘제국의 위안부’의 취지가 “’위안부의 자발성’ ‘강제 연행의 부인’ ‘동지적 관계’와는 거리가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김 기자가 극우논리를 뒷받침하는 책으로 읽은 건 책의 취지와 맥락을 무시한 결과다. 김 기자와 똑같이 받아들인 지원단체가 책의 또 하나의 중심이었던 자신들에 대한 비판은 은폐하고 똑같은 말로 소송을 건 탓에 ‘제국의 위안부’는 무려 9년 4개월이나 법정에 갇혀 있어야 했다. 나 자신과 국가가 함께 그렇게 소모됐다.

나는 “국가책임을 묻기 어렵다”가 아니라 “국가책임을 ‘법적’으로 묻기 어렵다”고 썼다. 여성들은 남성들과 달리 법의 바깥에서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그건 근대국가의 여성차별의 결과라고 일본을 비판했다. 나는 그저 국가책임을, 기존 주장과는 다른 방식으로 물었을 뿐이다.

‘업자’의 존재를 강조한 이유는 위안부문제가 중간계급에 의한 하층계급의 착취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런 지적이 일본의 국가책임을 희석하는건 아니라는 건, 과거에 반성적인 아사히신문이나 마이니치신문이 ‘제국의 위안부’를 ‘제국의 책임’을 물은 책으로서 높이 평가해준 사실이 증명한다.

따라서 위안부 피해자들을 분노하게 만든 건 내가 아니라 나의 책을 왜곡해서 할머니들에게 전달한 사람들이다. 나의 책이 아베정권과 일본극우의 논리를 정당화하는데 기여했다고 10년가까이 주장해 온 지원단체와 한치도 다르지 않은 김 기자의 칼럼 역시 그럴 것이다. 하지만 위안부에게 모욕과 멸시가 쏟아진다면 그건 ‘제국의 위안부’탓이 아니다. 자신들의 기존주장을 지키기 위해 나의 책을 멋대로 해석/비난/전파한 ‘오독하는 독자’들 탓이다. 그런 독자의 오독이 저자의 책임일 수는 없다.

학문이란 기존 정설을 비판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법이다. 따라서 30년이상 주류였다는 사실이 곧 기존 운동가나 학자들의 주장의 옳음을 증명하는 건 아니다. 실제로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시각으로 기존 연구를 비판하는 연구도 최근엔 나오고 있다. 전 정대협 대표였던 정진성 교수조차 강제 연행과는 다른 인식을 반영한 보고서를 일찌기 발간한 바 있다. 김 기자가 그 사실을 몰랐던 건 그들이 그 사실을 대외적으로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인 위안부 문제가 강제연행이고 불법이라면서 법적책임에만 집착해 왔던 정대협 운동가와 주류학자들은 한일합의를 ‘제국의 위안부’가 이끌었다면서 비난한 바 있다. 누구를 위한 화해였는지는 거기서 답을 찾아주기 바란다. 고발 직후 고발자 주변인들이 일본어판도 절판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