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에서 9·19 남북군사합의가 잘 지켜지고 있는지, 한반도 평화에 기여하고 있는지 설전이 오갔다. 신원식 국방부 장관은 북한이 지난 5년간 약 3600회 군사합의를 위반했다고 지적했고,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실제로 군사충돌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라며 군사합의의 실효성을 강조했다.

국가 간에 맺은 평화협정, 조약은 평화를 보장할 수 있을까? 최정상들이 나서서 한 약속이니 신뢰할 만하다고 답한다면 참으로 순진한 생각이다. 역사적으로 지난 20세기만 보더라도 평화를 이끌어내는 데 실패한 크고 작은 평화협정이 셀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최근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또한 그렇다. 1993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오슬로협정은 이른바 ‘두 국가 해법’으로 양국의 공존 가능성을 제시하였고, 협정의 주역들은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팔 갈등은 계속되었고, 협정 체결 만 30주년을 갓 넘긴 지난달 이스라엘은 역사상 최악의 공습을 당했다. 그 밖에 베트남평화협정(1973년), 독소불가침조약(1939년), 베르사유조약(1919년) 등 처참한 전쟁으로 귀결된 평화협정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국가 간의 평화는 대단히 전략적인 과제로서 이성적, 과학적인 접근을 요한다. 미국의 대표적 정치현실주의자인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는 “미국에는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고 오직 국익만이 존재한다”고 했다. 다소 단적인 표현일 수도 있지만 모든 외교활동의 목적은 국익 극대화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타국에 대한 양보도, 지원도 치밀한 전략적 판단하에 이루어져야 한다. 내가 먼저 한 수 접으면 상대방도 으레 따라와주겠지 하는 사인(私人) 간의 도덕심과 감성을 국가적 문제에 동원해서는 국익에 부합하는 결정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국가 이상의 상위 권위자가 없는 국제체제에서 국방력은 국가가 국익을 위한 배타적 결정을 내리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 국가는 외세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 국민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배타적 입장의 양 국가 간의 평화는 평화를 향한 양국의 공감대를 기반으로 협상을 통해 타협에 도달하는 수많은 과정을 거쳐 경제, 문화, 사회적 교류가 민간에 정착할 때에 비로소 찾아온다. 군사 대비 태세를 허물 시점은 이러한 민간의 신뢰를 기반으로 더 이상 배타적인 요구를 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관계에 이른 후가 되어야 한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가 9·19 군사합의 이후 즉각적으로 군 경계를 완화한 것은 민족적 동일성이라는 감성적 가치에 경도되어 국익을 위한 국가적 처신을 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10월 3일 조선중앙통신에 의하면 ‘핵무력 고도화’를 명시한 북한 사회주의헌법 개정안이 최고인민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지난해 9월 핵무력 정책을 법령화한 데 이어 헌법에까지 반영한 것이다. 이쯤 되면, 북한의 각종 도발행위가 구체적으로 군사합의에 반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한다. 단계적 비핵화를 표방한 협정의 핵심 가치에 정면으로 반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평화의 실체에 대한 양측의 공감대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해묵은 군사합의에 집착하지 말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군사력 정상화는 전쟁을 위한 것이 아니다. 국방력을 갖춘 국가만이 국익을 위한 목소리를 낼 수 있고, 평화를 향한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