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우물에는 침을 뱉지 말아야 한다. 언젠가 내가 그 우물물을 다시 떠먹을 수 있으니. 성년이 되어 애증의 대상인 고향을 떠날 때에는 돌아오지 않겠노라 호기롭게 자신했다. 30년 꼬박 작가로 살다가 골방에서 나와 우연인 듯 필연인 듯 강원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돌아온 고향은 저출산·고령화의 직격탄을 맞아 붕괴를 넘어 소멸의 예감에 시달리고 있지만, 문화예술이야말로 인간다운 삶의 마지막 보루라 믿고 지난 1년여를 동분서주했다.

탄자니아의 세렝게티 국립공원의 코끼리 무리 . 너머로 킬리만자로산이 우뚝 솟아 있다. /롯데관광 제공

경계 없이 자유로워야 할 것이 예술이고 예술가는 가장 사적인 존재여야 마땅하다. 그러나 모두가 ‘방 안의 코끼리’를 알고 있다. 진영 대립(이라기에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넘어 스키 슬로프에 가깝지만)과 공공 지원을 둘러싼 갈등이 첨예한 곳이 문화예술계이기도 하다. 코끼리는 코끼리로 인정해야 한다. 지역 신문과 한 첫 인터뷰에서 나는 누구의 편도 아닌 예술가의 편이라고 밝혔다.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데 있어 외부의 입김에 휘둘리지 않고 소속이나 정치적 견해와 상관없이 예술가와 예술 자체를 옹호하겠노라고.

내 얼굴에 침 뱉기지만 예술가란 작자들은 대개 귀도 얇고 입도 싸고 말도 많고 탈도 많다. 세상없이 새롭거나 세상 무엇과도 다르기 위해 삶과 사고방식이 얼마간 별스럽고 반항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속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섣불리 ‘문화 전쟁’을 벌인다면 승자 없이 패자만 그득한 폐허가 될 것이다. 오로지 작품으로 말하고 작품성으로 승부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응원하는 것이 코끼리와 공생하는 초원의 아름다운 생존법이다.

나를 반기든 반기지 않든 각각 다른 단체가 주관한 ‘김유정 문학상’ 시상식에 두 번 다 참석했다. 29세에 요절한 미혼의 작가를 자손을 대신해 기리는 일에까지 진영 논리와 편 가르기가 개입해서는 안 될 일이다. 지난해에는 추모제를 두 번 치르던 변괴에서 가까스로 벗어났고 올해는 쪼개어졌던 문학상의 통합을 꾀하고 있다.

당사자는 여태 내막을 모를 테지만, 심의 과정에서 제출한 기획서와 다른 내용을 무대에 올리려다 직전에 무산될 뻔한 공연을 살려낸 적도 있다. 현 도정에 대한 비판이 아닐지라도 ‘위험한’ 무대는 용인할 수 없다고 펄펄 뛰는 담당관을 향해 예술가들은 그냥 놔두는 게 최선의 방책이라고 목이 쉬도록 외쳤다. 공연은 무사히 막을 내렸고, 담당관과 나는 각자 맡은 바에 충실했던 서로를 이해하며 화해했다.

세금을 지원받아 저항하는 것이 저항인지 투항인지 헛갈리고,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이야말로 이상적인 몽상으로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정치·경제 등의 중대사에 곁딸린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받기 일쑤인 문화예술의 소외감을 생각하면 스키 슬로프의 기울기조차 가파르다고 탓할 수 없다.

2023년 9월 발표된 2024년 문화예술 분야 정부 예산은 2조2704억원으로 전년 대비 1.9퍼센트 삭감되었다. 문체부 예산이 전반적으로 감소한 상황에서 문화예술 분야가 축소율에 비해 큰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왜’라는 질문과 ‘무엇을 위해’라는 대답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기초 예술과 문화예술 교육 관련 지원이 쪼그라든 가운데 ‘시장’에서 승부가 가려져야 마땅한 콘텐츠와 관광 예산은 10퍼센트 이상 증가했다. 문학 나눔과 세종도서 나눔 사업은 통합되면서 예산이 줄어 문학계와 출판계를 싸움 붙이냐는 반발을 사고 있다. 모두가 문화가 곧 ‘철학’이며 ‘현장’에 답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결과나 다름없다. 얼마 전 ‘현장’ 출신 유인촌 장관이 17개 광역문화재단 대표들을 만나 내년은 올해와 다르리라고 했다는 약속을 기대할 뿐이다.

침 뱉은 우물물의 비유를 돌이키자면, 지금 이 글은 내가 ‘조선일보’ 지면에 처음 쓰는 칼럼이다. 이른바 ‘안티 조선’ 열풍이 거셀 때 나는 조선일보의 청탁을 거절했다. ‘안티’를 선언한 동료 작가들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언’에도 끝내 동참하지 않았다. 조선일보에 글을 쓰는 동료 작가들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침은 아무 데나 뱉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