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해양경찰청이 압수한 화물선 안 코카인 추정 물질./남해해양경찰청

지난달 15일 부산신항으로 들어온 화물선 한 척의 선체 아랫부분에는 정체 모를 가방이 비닐에 싸여 있었다. 그 안을 확인해 발견한 것은 코카인 100kg. 300만명 이상이 동시에 투약할 수 있는 양이었다. 배가 남미를 출발해 중국으로 가는 도중 발견됐지만 그 배의 국적은 우리나라였다. 우리나라가 해당 마약의 중간 기착지로 활용된 것일 수도, 소비지로 선택된 것일 수도 있다. 선박을 통한 마약류 밀반입 시도가 처음도 아니며, 아예 해상에 던져놓고 수거를 시도한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반입된 마약류는 우리 사회를 지속적으로 병들게 만들었다. 특히 지난해는 마약 사범 수가 처음으로 2만명을 넘었다. 전통적 마약류인 헤로인·코카인·필로폰은 물론, 식물을 원료로 하지 않고 원료 간 합성을 통해 제조되는 마약류들까지 대중 속으로 스며들면서 이에 중독된 사람들의 일상생활 붕괴가 심각해졌다. 게다가 약물에 취해 운전 중 피해자를 치어 사망에 이르게 한 이른바 ‘롤스로이스’ 사건이나 차량 접촉 사고를 낸 뒤 신고받고 출동한 경찰관 앞에서 춤을 추던 운전자 영상은 마약류 복용이 단순히 투약자 혼자만의 피해에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흐름의 시작에는 한국을 마약류 투약 시장으로 만들어 자신들의 영리를 극대화하려는 조직적인 마약류 제조·공급 사범들이 있다. 현재 마약류 공급과 판매는 조직원 간에도 서로 만나지 않고 비대면(非對面)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고, 이 과정에 익명성이 강화된 다크웹과 텔레그램 등이 주요 통신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유통 과정에서도 현금이 직접 오가지 않고 가상 자산을 통해 자금을 세탁하는 형태로 진화했다. 조직이라고 꼭 대면하여 허리를 90도로 굽히는 경례를 하던 모습은 현 마약류 조직에는 일상적이라 할 수 없다. 비대면으로만 활동이 이루어졌음에도 범죄 집단으로 인정된 소위 ‘n번방’ 일당처럼 이들 또한 비슷한 형태를 띠어가고 있다. 투약자에게 실물이 최종 전달되는 과정조차 마약류를 특정 장소에 두고 가는 이른바 ‘던지기’ 수법으로 대면 없이 이루어지기에 투약자들은 조직 하부에 위치한 소위 ‘드로퍼(중간 유통책)’조차 만날 일이 없다.

이처럼 조직적 마약류 제조·공급 사범을 단속하는 환경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수사기관의 마약 수사 역량이 강화돼야 하지만, 그에 앞서 그들이 변화된 환경에 뒤처지지 않고 조직의 최윗선까지 제대로 뿌리 뽑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줘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수사기관의 위장 수사다.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고 그 신분을 범죄 조직이 믿도록 하기 위한 증명서 작성 등 신분 창설 행위들이 뒷받침돼야 한다.

하지만 현행법상 아동·청소년 대상 디지털 성범죄 수사에만 신분 위장 수사가 허용돼 있다. ‘n번방’ 피해자들이 범죄 집단의 조직적 유인 행위에 당해 성 착취물을 촬영당하고 일부는 유포돼 그들에게 불법 수익을 안겨주며 평생 씻지 못할 상처를 입은 사례가 청소년성보호법 개정으로 이어진 것이다. 당시 성 착취물의 유통 구조 근절을 위해 도입된 위장 수사가 지금의 마약류 범죄에도 필요한 시점이다. 영국은 수사권한규제법에 신분 비공개 잠입 수사와 신분 위장 수사를 규정하고 있으며, 독일도 마약류, 무기 거래, 통화 위조, 조직범죄 등에 한해 신분 위장 수사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다만 인권침해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사전에 상부 수사기관의 승인, 사법기관의 허가 등을 요건으로 정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청소년성보호법도 검사 청구와 법원 허가라는 통제 절차가 있고 주기적으로 국회에 보고하는 장치도 갖추어 놓았다.

최근 마약류 사범 급증, 비대면 거래 환경으로의 급속한 전환, 제조와 공급 사범의 점조직화 등을 고려한다면 인권침해 우려를 기본적으로 갖고 있음에도 위장 수사 도입은 실기(失期)할 수 없는 문제다. 외국의 사례를 토대로 인권침해를 방지하기 위한 통제 장치를 제대로 갖춘 가운데 조직적인 마약류 공급 사범에 대한 위장 수사 도입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