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전 총리 파머스턴경은 1870년에 최초의 전보(電報)를 받고 “맙소사! 이제 외교는 끝났네!”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1903년 미국의 한 은행가는 포드사(社)에 대한 투자를 권유받고 “말(馬)은 앞으로도 계속 우리 곁에 있겠지만 자동차는 지나가는 유행에 불과하다”며 투자를 거부했다고 한다.

과거 신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우리는 이처럼 상반된 반응과 빗나간 예측으로 시행착오를 거듭해 왔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를 송두리째 바꿔 버릴지도 모를 인공지능(AI)에 대처함에 있어 이 같은 시행착오를 반복할 여유는 없다. AI 기술로 이미 군사 분야는 화학적 변화를 겪고 있다. 방대한 정보의 신속한 처리, 분석, 학습 능력을 바탕으로 병참, 첩보, 작전 수행, 지휘, 통제에 이르기까지 AI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AI 혜택은 계속 누려야겠지만 군사적 이용의 위험은 최대한 막아야 할 때다.

이달 초 우리나라가 네덜란드, 싱가포르, 케냐, 영국과 함께 제2차 ‘AI의 책임 있는 군사적 이용에 관한 고위급회의(REAIM Summit)’를 주최한 것은 이러한 국제적 노력을 선도하기 위해서였다. 96국 정부 대표단과 시민단체, 기업, 학계 대표들은 신속한 규범 마련을 촉구했다. 또한 군사 분야 AI 기술의 파장과 최소한의 방호벽, 기본 원칙의 실천과 거버넌스 구축 방안 등을 진지하게 논의했다. 그 역사적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 군사 분야 AI 규범 설정을 위한 선제적이고 포용적인 대화를 시도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1949년 제네바협약은 전시에 인간 존엄을 보호하기 위한 보편적 규범을 마련한 기념비적 문서였다. 그러나 1, 2차 세계대전이 이미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후였다. 필자는 이번 회의 개회사에서 더 이상 늦지 않게 AI 시대의 새로운 군사 규범을 마련할 것을 촉구했고, 38명의 장·차관을 포함한 96국 정부 대표들과 62개 기관은 같은 목표를 향한 일념으로 열띤 토론을 벌였다.

둘째, 작년 1차 회의 합의문인 ‘행동 촉구서(Call to Action)’에 이어 ‘행동을 위한 청사진(Blueprint for Action)’이라는 구체적인 합의문을 채택했다. 인간 중심성과 책임성을 재확인하고 실천 방안을 세분화해 앞으로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전략적 이해관계의 충돌로 조그만 합의조차 불가능한 군사적 현실 속에서 이뤄낸 성과이기에 더욱 그 의미가 크다. 합의문 동참국도 지난 회의 57국에서 61국으로 늘었다.

셋째, 이번 회의는 우리나라가 올해 세 번째로 주최한 AI 관련 대규모 국제회의였다. 3월 민주주의 정상회의에서 딥페이크 등의 폐해를 논의하고, 5월 AI 서울 정상회의에서는 ‘AI 안전, 혁신, 포용에 관한 서울 선언’을 발표했다. 이어서 AI의 책임 있는 군사적 이용에 관한 ‘행동 청사진’까지 내놓았으니 우리나라는 이제 민·군을 포함한 모든 AI 분야에서 국제적 규범 설정을 위한 담론을 주도하게 됐다. 우리의 높은 기술력은 물론 민주주의 원칙과 가치에 대한 확고한 공약 및 실천이 없었더라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파머스턴경의 걱정과는 달리 외교는 과학기술의 혁명적 발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힘을 잃지 않고 살아 있다. 우리는 곧 개최되는 제79차 유엔총회에서 군사 분야 AI에 대한 결의안을 상정해 지금까지 해온 노력과 리더십을 이어갈 것이다.

AI에 대한 안이한 사고도, 지나친 공포도 모두 경계하되, 책임의 주체가 우리 인간임을 명심하면서, 보다 안전하고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앞장설 것이다. 글로벌 중추국가 비전이 단순한 외교적 수사나 구호가 아님을 행동으로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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