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준 한국연구원장

온 나라가 잔치 분위기다. 노벨문학상이 드디어 한국문학에 주어지고 나니 지난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한강의 노벨 문학상을 가능케한 공덕으로 번역 보급을 많이 꼽는다. 맞다. 결과는 간명하지만 과정은 드라마틱했다. 한강의 출세작이자 노벨상 수상작인 <채식주의자>가 최초로 영역되어 발표된 곳은 하버드대학교 한국학연구소가 발행한 잡지 AZALEA 3호다. 이 잡지를 통해 영미권 독자들과 출판 에이전트들이 처음으로 한강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다. 데보라 스미스라는 번역자가 자신의 첫 번역 작품을 발표한 것도 이 잡지를 통해서였다. 이 잡지의 탄생 또한 극적이다.

2006년 초여름, 나는 하버드대학교 앞 찰리스 키친이라는 햄버거 집에서 데이비드 맥캔 교수와 점심을 먹고 있었다. 맥캔 교수는 학위를 갓 마친 나에게 “What’s next?(다음은 뭐지?)”라고 물었다. 내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How about a magazine? (잡지는 어때요?)” 그의 대답 또한 간단했다. “하자.” 그의 한국어 발음은 묘한 울림으로 아직도 내 귓가에 남았다.

이 장면이 만들어지게 된 데는 세계적인 주간지 <뉴요커> 문학담당 기자의 조언이 결정적이었다. 한국문학을 가르치면서 많은 작품을 번역하고 시조 보급운동을 하던 맥캔 교수에게 그 기자는 책을 내려고 노력하지 말고 우선 잡지에 작품을 실어라고 조언했다. 미국의 편집자나 출판 에이전트는 잡지를 통해 작품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길은 정해졌다. 수십 년을 투고해도 번역작은 거의 실리지 않은 미국의 문학잡지에 목매달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잡지를 만들자. 한국에서 오랜 동안 편집자 일을 했던 나와 맥캔 교수는 단박에 의기투합했다.

그렇게 해서 하버드대학교 한국학연구소에서 발행하는 AZALEA(진달래)가 탄생했다. 잡지 발간의 재원은 한국문학의 번역과 보급을 위해 재단을 만든 뒤 수십년간 홀로 지원해온 YBM의 (재)국제교류진흥회가 전적으로 맡기로 되었다.

YBM의 창립자인 고 민영빈 회장은 한국문학이 해외에 널리 알려지기 위해서는 번역 사업 지원과 번역가의 양성이 중요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1982년 (재)국제교류진흥회를 설립했고 설립과 동시에 활발한 번역 작업이 이루어졌다. 황순원, 김동리, 박경리, 최인훈, 이문열 등의 작품이 속속 번역되었고 작가들의 해외 순방 독회나 한국문학 워크샵 등 전방위적 지원이 이루어졌다. 지난 사십여년간 이루어진 지원액은 작년까지 75억원을 상회한다. 하지만 여전히 작품 보급은 한계가 뚜렷했다. 원어민 번역자 양성이 절실했다.

1997년부터 원어민 번역가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시작됐다. 당시로선 파격적으로 1인당 매년 2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이 기금의 수혜자 리스트는 화려하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수혜자는 데보라 스미스다. 런던대 박사과정에 입학해 독학으로 한국어를 배우면서 이 기금에 지원한 그녀는 출판된 번역 작품이 하나도 없는 초보자였다. 하지만 눈 밝은 심사자는 그녀를 행운의 수혜자로 선정했다. 2015년까지 4년 동안 재단에서 8만 달러를 지원받아 번역 활동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 한국문학으로선 그야말로 신의 한 수가 되었다. 데보라 스미스는 AZALEA에서 이미 부분적으로 소개되었던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자신이 재번역해서 출간했고, 이 작품이 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하면서 한강의 노벨상 수상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사십여년 전 누구도 시작하지 못한 원대한 구상을 실천으로 옮긴 민영빈 회장은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결실을 보지 못하시고 2018년에 작고하셨다. 민영빈 회장님과 함께 이 재단의 선도적인 기획을 함께 추진했던 여석기 선생님은 AZALEA가 세계 대학의 가장 인기 있는 한국문학 교재로 성공한 것을 기뻐해주셨지만 2014년에 돌아가셨다. 하지만 저승에서도 한강의노벨문학상 수상을 기뻐하실 것으로 믿는다. 이런 거인들의 기획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던 나로서도 영광이었다.

이 재단은 위의 사업 외에도 옥스포드 대학교 한국학 전담 교수직 설치, 캐나다 UBC의 한국문학 및 번역을 위한 교수직 설치, 한국문학 박사과정 장학금 등 전방위적 지원을 지금도 쉬지 않고 있다. 재단의 설립 취지에 맞게 한국의 다양한 문화와 국내 작가들의 유명 작품들을 해외에 지속적으로 소개하고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위한 지원 사업은 앞으로도 계속될 예정이며 현재 동 재단의 이사장은 민선식 YBM 회장이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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