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수 서울 서초구청장

대입 수학능력시험이 보름 앞으로 다가왔다. 고3 시절을 떠올려본다. 마음이 흔들릴 때 독서하며 평정심을 찾던 나는 습관처럼 책을 한 권 꺼내들었다. 그리스 신화에 관한 책이었다.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있는 정의의 여신 디케에게 매료돼 법대를 생각했다.

구청장이 되고 나서 지켜야 할 약속이 많아졌다. 주민 건의를 반영하고 불편 사항은 빨리 개선하는 내용들이다. 때론 약속이 바로 이행되기도 하고, 수년의 시간이 소요되기도 한다. 2년 만에 결실을 맺고 약속을 지켜낸 일이 최근 있었다.

강남역 사거리에 ‘누구를 수사하라’ ‘누구를 구속하라’ 등 특정인 비방이 가득 쓰인 현수막들을 치워달라는 민원이 들어왔다. 아이의 손을 잡고 거리를 걸어가던 엄마가 섬뜩한 현수막을 보고 아이의 눈을 가리고 싶었다고 했다. 나는 주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불법 현수막을 철거하기로 약속했다.

먼저, 대로변에 무분별하게 설치되어 도시 미관을 해치고 불편을 주는 불법 집회·시위 현수막을 전수조사했다. 유동 인구가 많고 기업이 밀집한 강남역과 현대자동차 본사 앞, 그리고 대법원 주변에 현수막이 난립해 공적 영역이 불법으로 잠식되고 있었다.

그러나 경찰에 집회 신고된 광고물은 옥외광고물법 8조의 적용 배제(구청에 허가나 신고 없이 표시·설치 가능) 대상으로 분류돼 정비 대상에서 제외돼 있다. 그래서 민원이 빗발치는데도 구청에서 철거할 수 없어 골머리를 앓았다. 우선, 시위자에게 현수막을 자진 철거하도록 꾸준히 설득을 이어가는 동시에, 단속 근거를 찾아 나선 끝에 ‘집회·시위자 없이 현수막만 걸려 있는 경우’ 철거가 가능하다는 변호사의 법률 자문을 거쳤다. 이를 바탕으로 ‘시위 현수막 일제 정비 방안’을 마련하고 소매를 걷어붙였다. 경찰에 집회 신고를 하고 현장에는 없는 꼼수 시위자와의 숨바꼭질이 시작됐다.

강남역 사거리 불법 현수막 정비를 위해 강남구, 서초경찰서와 함께 합동 작전을 펼쳤다. 행정대집행을 위한 사전 절차를 진행하며 자진철거 설득도 병행하는 노력 끝에 지난 9월 14일 강남역 8번 출구와 1번 출구 쪽 불법 현수막 20여 개와 천막 1개소를 마침내 철거하게 됐다. 힘겹지만 준법 여정에 함께해 준 강남구와 서초경찰서에 감사하고, 긴 시간 기다려준 주민들에게도 감사드린다. 이에 앞서 지난 8월 대법원 정문 주변 불법 현수막 50여 개와 지난해 6월 현대차 앞 현수막 등 불법 광고물 43개도 행정대집행으로 철거했다.

불법 현수막은 작년 서울에서 수거된 양만 21만장이 넘는 도로의 교통안전을 방해하는 골칫거리다. 서초구는 전국 최초로 광고물 정비를 위해 구청과 유관기관(법원·검찰·경찰) 4자 간 실무협의체를 구성해 정당한 표현의 권리는 보호하되, 꼼수 집회를 막고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엄정 대응하려고 한다. 대형 천막과 명예훼손 표현이 담긴 현수막은 집회·신고 접수 시 경찰 심사과정에서 제한할 수 있도록 하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개정도 필요한 시점이다.

‘팍타 순트 세르반다’. 오래전 법대생 시절 마음에 품은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는 뜻의 라틴어 법언을 되새기며, 오늘도 구청장으로서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한 걸음을 내디딘다. 다시 아이들의 밝은 웃음소리와 기업의 활발한 비즈니스가 거리에 채워져 역동적인 도시로 뻗어나가는 그 길에 주민과의 약속이 커다란 동력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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