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라고 흔히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시각장애에 대한 편견이다. 시각이 손상되었다고 해서 시각장애인들이 오직 백냥 으로만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시각장애인들은 촉각을 비롯해 청각, 후각 등 다른 감각을 활용해 정보를 수집하고, 사물을 인지하며, 학습하고 판단한다. 손가락 끝의 촉각으로 점자를 사용할 수 있기에 백 냥이 아니라 삼백 냥, 천 냥의 몸을 만들 수 있다. 점자를 통한 정보 접근 환경이 갖추어지는 수준에 따라 시각장애인도 천 냥에 최대한 가깝게 살아갈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 시각장애인들은 한글 점자를 창안한 송암 박두성 선생께 감사드린다.
점자는 시각장애인에게 희망을 열어줬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점자법’은 매년 11월 4일을 ‘점자의날’로 지정했다. 시각장애인의 점자 사용 권리를 신장하고 점자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이해도 높이도록 하고 있다.
점자가 시각장애인에게 지속적으로 희망을 주기 위해서는 정보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 한글 점자가 한글과 동등한 문자라는 인식을 전 국민에게 확산시켜야 하고, 시각장애인의 점자 사용 환경 개선을 위한 법과 제도를 지속적으로 정비해야 한다. 점자의 특성을 잘 살려 4차 산업혁명에 부응하는 점자 관련 디지털 기술도 개발해야 한다.
한글 점자 반포 98년째인 올해는 여느 해보다 더욱 뜻깊다. 지난 7월 의약품과 의약외품에 점자 표기가 의무화된 약사법이 시행됐다. 의료 기기와 식품 등에도 점자 표기를 권장하는 법률이 시행됐다. 시각장애인이 원하는 식품을 구입하고, 필요에 따른 의약품을 골라 복용할 수 있는 문이 막 열리기 시작했다.
최근 사법기관이 소송 등에서 필요한 각종 문서들에 대해 시각장애 당사자의 요청이 있는 경우에 관련 문서를 점자 문서로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행정기관 및 공공기관에서의 점자 문서 제공은 제자리걸음이다. 우리나라는 시각장애인의 출판물 접근권을 개선해야 한다는 세계지적재산권기구의 ‘마라케시조약’을 비준했지만 시각장애인들이 출판물을 점자 자료로 제공받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최근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독서 열풍이 일고 있다. 시각장애인들이 책을 읽고 싶어도 원하는 도서를 점자로 접근하는 데 3개월 이상 걸리는 것이 현실이다.
시각장애인들은 여전히 점자 도서에 대해 배고파하고 있다. 일제 치하에서 송암 박두성 선생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동시대뿐 아니라 미래 시대의 시각장애인을 위해 한글 점자를 창안했다. 전 세계적으로 고유한 점자를 보유한 나라는 얼마 되지 않는다. 이렇게 소중한 한글 점자의 사용을 제약하고 있는 정보 접근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
2년 후면 한글 점자 반포 100돌이 된다. 하나의 문자가 창안되어 100년 동안 대중이 익히고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그 문자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한글 점자 반포 100돌을 앞둔 지금 시각장애인들이 화장품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용품을 점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도록 점자 사용 환경을 지속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이를 위해 민간 사업자들의 관심과 지원을 요청한다. 오늘 한글 점자의날을 맞이해 시각장애인도 비장애인처럼 베스트셀러는 물론이고 모든 도서를 원하는 즉시 점자로 읽을 수 있도록 국립장애인도서관 독립 청사를 하루속히 건립해 줄 것을 정부와 국회에 다시 한번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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