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노동부가 최근 발표한 근로시간 개편 방안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이 14일 재검토를 지시했다. 근로시간 유연화 필요성도 분명 있지만, 그간 지적이 있었던 ‘저출산’ 문제 관련성도 면밀히 들여다봤으면 좋겠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월 2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열린 가족 및 의료휴가법(FMLA) 30주년 기념행사에서 카말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연설하고 있다. 클린턴 대통령이 서명한 최초의 법안인 FMLA는 근로자가 특정 가족 및 의료 사유로 최대 12주 동안 무급으로 일자리를 보호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다. /EPA 연합뉴스

정부는 현행 주 52시간제를 최장 주 69시간까지 가능하도록 개편하되, 연장 근로를 한 만큼 장기 휴가를 쓸 수 있게 하겠다고 했다. 정말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면 선호하는 근로자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육아 중이거나 출산 계획이 있는 맞벌이 부부는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갑자기 몰아치기 야근을 하게 됐다고 해서 보육 기관이나 도우미가 그만큼 아이를 더 맡아주는 것은 아니다. 그 후 장기 휴가가 생겼다고 아이를 줄곧 기관에 보내지 않거나 도우미를 내보낼 수도 없다.

물론 저출산이 꼭 노동 정책 탓은 아니다. 미국에는 연장 근로시간 규제가 전혀 없다. 유급 출산휴가·육아휴직이나 무상 보육도 보편적이지 않다. 자국의 노동이나 보육 정책을 유럽과 비교하며 불평하는 미국인도 많다. 그런데도 합계 출산율은 한국의 두 배를 웃돈다. 여러 이유로 출산을 많이 하는 계층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통상 출산율이 낮다는 고학력 맞벌이 가정도 한국보다는 아이를 많이 낳는다.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미국 문화의 중심에는 정말 ‘가족’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년 5월 조 바이든 대통령의 방한 때 백악관에서 한국을 담당하는 고위 당국자가 동행하지 않았다. 까닭을 수소문해보니 “딸의 졸업식에 가야 해서”라고 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인데 미국인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대통령을 수행할 사람은 많지만, 딸에게 아버지는 한 명뿐 아니냐는 것이다. 정부 기관이나 싱크탱크를 가봐도 책상마다 가족 사진이 놓여 있다.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한다”며 저녁 약속을 거절하거나 일찍 회의장을 뜨는 사람도 종종 볼 수 있다.

공공 기관에서만 그러는 것도 아니다. 작년 여름, 주말에만 보이던 나이 든 아파트 관리 직원이 평일 아침부터 나와 있었다. 웬일인지 묻자 “방학 때는 초등생 자녀를 둔 여직원이 출근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직원들이 근무를 나눠 해 준다”고 했다. 그 여직원은 개학 후 복귀했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가족이 직장 일에 영향을 줘서는 안 된다’고 믿어 왔다. 하지만 가정이 있는 사람에게는 가족을 돌볼 시간도 당연히 필요하다. 미국 사회는 제도 대신 문화로 이를 채우고 있는 것 같다. 아이를 재워 놓고 다시 집에서 업무를 보더라도, 일단 아이를 보러 퇴근해야 한다는 사실은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다. 이런 가족 중심 문화가 한국에도 형성되기를 기다리기엔 저출산 문제가 너무 시급해 보인다. 그래서 정부 역할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