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미국 캘리포니아주 전력 관리·감독기관이 143쪽 보고서를 내놓았다. 지난해 8월 14~15일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한 순환 정전 사태의 원인을 분석한 최종 보고서였다. 당시 섭씨 40도까지 치솟는 폭염 속에 정전 첫날에는 41만 가구, 다음 날에는 20만 가구에 예고 없이 최대 1시간 동안 전력 공급이 중단됐다.
보고서는 정전의 주요 원인으로 30년 만의 최고 기온과 함께 재생에너지를 지목했다. 정전이 시작된 시각은 8월 14일 오후 6시 38분, 8월 15일 오후 6시 28분. 해가 떨어지면서 태양광 발전 출력이 급격히 낮아지는 순간이었다. 캘리포니아 전체 발전량에서 재생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율이 30%가 넘는데 그중 절반 가까이가 태양광이다. 보고서는 “저녁이 돼도 기온이 내려가지 않아 냉방 수요는 여전한데 태양광 발전량이 갑자기 줄면서 전력 공급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며칠 전에는 미 텍사스에서 기록적인 한파로 풍력발전기 터빈이 얼어붙어 전력 공급에 차질을 빚었다. 텍사스는 최근 10년 새 풍력발전을 3배로 늘렸는데 추위 속에서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에너지 전문가들은 “캘리포니아와 텍사스의 정전 사태는 원전을 접고 재생에너지를 확대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지적한다. 미국은 천혜의 태양광·풍력 발전 조건을 갖추고도 재생에너지가 전력 수요를 충분히 감당하지 못하는데 우리는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일사량이 많은 캘리포니아는 태양광 발전소의 설비 이용률이 25%가 넘지만 우리나라는 15% 수준이다. 한국과 비교할 때 텍사스는 바람의 세기가 강하고 일정해 풍력발전 이용률이 우리보다 높다.
이번 겨울을 거치면서 정부의 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이 국내 전력 수급 안정성을 위협한다는 우려가 증폭됐다. 한파가 몰아쳤던 1월 첫 2주 동안 전력 소비가 가장 많은 피크 시간대에 태양광이 전체 발전량에서 차지한 비율은 0.4%였다. 큰눈이 내린 이후 강추위가 이어지면서 태양광 패널 위에 쌓인 눈이 얼어붙어 며칠간 전력 생산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다.
손양훈 인천대 교수는 “문제는 원전을 대신해 재생에너지와 함께 전력 공급의 한 축을 맡게 된 LNG(액화천연가스) 역시 에너지원으로서 취약성을 드러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중순 동북아 지역의 LNG 현물 가격은 작년 12월 초 대비 4배 넘게 급등했다. 강추위로 난방 수요가 급증한 데다 호주·카타르 등 주요 LNG 수출국에서 코로나 여파로 생산공장 중 20% 이상이 폐쇄돼 공급이 줄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100% 수입에 의존하는 LNG의 가격 변동과 수급 불안은 전력 공급 안정성을 해치는 요인이다.
한순간이라도 전력 공급이 수요를 맞추지 못하면 정전 사태를 맞을 수 있다. 위기는 한 번 터지면 피해가 막심하다. 에너지 안보를 운에 맡기는 일은 없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