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만 사업체를 운영하는 선배를 만났더니 “요즘 은행들이 웃긴다”고 했다. “사업 자금을 빌려 쓰라고 그렇게들 귀찮게 하거든. 그런데 아이 학교 때문에 이사 가려고 했더니 개인 대출은 아예 막혀 있어. 그러니까 은행 지점에서 1번 창구는 돈 갖다 쓰라 성화고 2번 창구는 안 빌려준다고 버티는 식인데, 이거 코미디 아니냐.”
그의 말대로 요즘 돈 빌려주는 시장이 뒤틀려 있다. 가계 대출에만 이중 삼중으로 족쇄가 채워져 있다. 명분은 가계 빚 증가를 막자는 것이다. 하지만 속내는 집값을 억제할 가용 수단이 바닥났기 때문에 마지막 수단으로 돈줄을 죄겠다는 것이다. 금융 당국의 한 간부는 “요즘 우리는 소방관 대신 불 끄러 다니는 의용 소방대원 같다”고 했다. 집값 잡는 데 국토부 공무원들 대신 동원됐다는 얘기다.
힘으로 가계 대출을 누르다 보니 가격이 뒤틀려 있다. 한국은행 집계를 보면 작년 10월은 대출 금리가 기업 2.68%, 가계 2.64%였다. 가계가 기업보다 소폭 싸게 돈을 끌어왔다. 하지만 1년 만에 뒤집혔다. 올해 10월 대출 금리는 기업 2.94%, 가계 3.46%다. 가계 대출 금리가 기업보다 0.5%포인트 이상 높아진 건 18년 만에 처음이다. 은행들이 가계만 제물로 삼아 고리대금업을 하고 있지만 금융 당국은 못 본 척하고 있다. 은행들의 올해 이자 수익은 3분기까지 33조원이 넘었다.
가격 왜곡에 그치면 그나마 다행이다. 금융회사들은 가계 대출을 중단하다 재개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당국이 정해준 대출 총량 규제에 맞추려다 보니 어쩔 수 없다는 항변이다. 그러나 저개발 국가에서도 이런 식으로 오락가락하며 국민을 우롱하지는 않는다. 약삭빠른 사람들은 서류상 회사를 세운 뒤 사업 자금 대출을 받아 집을 산다. 남들 모르는 뒷문을 활용하는 이들이 나타난 셈이다.
물론 부동산 경기 과열을 막기 위해 대출 규제가 어느 정도 필요한 건 옳다. 금리 상승기를 맞아 가계 부채 관리도 필요하다. 하지만 규제는 합리적이어야 하고 예측 가능해야 한다. 실수요자 피해는 최소화해야 한다. 이런 원칙은 무시되고 현장에는 무질서와 우격다짐만 판친다. 집값이 특정 액수를 넘어설 때 주택 담보대출이 아예 불가능한 나라가 몇이나 될까.
무모할 정도로 재건축·재개발을 막아 주택 수급에 실패한 탓에 금융 산업은 엉뚱한 길로 들어서고 있다. 돈을 융통한다는 금융의 본래 기능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경제 규모 세계 10위를 넘나드는 풍족한 자본주의 체제 국가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런 나라에서 신용이 있고 담보가 있는 사람마저 돈을 당겨 쓰지 못하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급전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턱없이 높은 금리를 물리는 국민 학대가 벌어지고 있다. 그야말로 금융 실종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