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러 가스관 사업은 계속 추진돼야 합니다.”
서울 외교가에선 지난 22일 김부겸 국무총리가 외신 간담회에서 한 이 발언을 놓고 뒷말이 무성하다. 한 외신 기자가 “문재인 정부가 추진해 온 남·북·러 가스관 연결 사업은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노르트스트림2와 비슷하다. 이 사업이 문재인 정부 이후에도 지속돼야 하느냐”고 묻자 이같이 답한 것이다.
남·북·러 가스관 사업은 한국~북한~러시아를 잇는 가스관을 깔아 러시아의 천연가스를 도입하는 프로젝트다. 한국은 에너지 도입선을 다변화하고 북한은 가스 통과료를 챙길 수 있다는 점에서 ‘남북 윈윈 사업’으로 꼽히며 보수·진보를 떠나 역대 한국 정부의 단골 대북 공약이었다. 김 총리는 답변 과정에서 남·북·러 가스관이 탄소 중립 달성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 필요하다는 원론적 설명도 곁들였다.
평상시 같으면 김 총리의 발언은 별 논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하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에 군대를 투입하며 침공을 개시한 날 이런 발언을 했다는 점이다. 듣기에 따라 러시아의 침략적 행태에 눈을 감았다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 남·북·러 가스관 사업이 자원을 무기화하는 푸틴 정권의 돈줄이 될 수 있다는 우려를 간과한 것이다.
김 총리의 발언은 에너지 안보 측면에서 더 논란이 됐다. 러시아는 이번 사태 이전에도 갖가지 이유로 파이프라인 밸브를 잠갔다 풀기를 되풀이하며 자국 천연가스에 ‘중독’된 유럽을 농락하곤 했다. 러시아가 남·북·러 가스관에 대해서도 이러지 말란 법이 없다. 더구나 남·북·러 가스관은 러시아도 어쩌지 못하는 불량 국가 북한을 관통해야 한다. ‘서울 불바다’ 운운하며 미사일을 쏴대고 우리 영토에 포격까지 퍼부은 북에 가스관 밸브는 한국을 갖고 놀 훨씬 간편한 도구가 될 것이다. 야당에서 “정부·여당이 얼마나 에너지 안보에 무지한지 깨달았다”는 탄식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김 총리에게 질문한 외신 기자는 우크라이나 사태와 현재 독일이 처한 상황을 언급하며 “한반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했다. 실제 독일은 탈원전에 따른 에너지 부족을 메우기 위해 러시아 천연가스에 대한 의존도를 높였고 그 결과물이 러시아~독일을 직접 잇는 노르트스트림2 가스관 사업이다. 미국은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로 이어지는 이 사업을 반대해왔다. 곡절 끝에 완공돼 사용 승인만 남겨두고 있었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가동이 무기한 보류됐다.
질문한 외신 기자는 한국의 상황과 닮은 ‘독일의 낭패’에서 김 총리가 어떤 교훈을 얻었는지 궁금했던 것 같다. 러시아의 천연가스에 목줄이 잡힌 독일은 러시아의 악당 짓을 제대로 비판하지 못해 구설에 올랐고, 13조원이 투입된 초대형 가스관 프로젝트는 애물단지가 됐다. 남·북·러 가스관의 ‘장밋빛 미래’보다 ‘불편한 진실’에 더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