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두 이야기는 사실일까. ① 조선 개국 때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궁궐을 동향(東向)으로 지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정도전이 ‘북악산 주산, 남향 궁궐’을 주장해 관철됐다. 무학대사는 ‘이제 200년 뒤에 큰 난리가 날 것’이라 걱정했는데 과연 조선 건국(1392) 꼭 200년 뒤(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② 19세기 왕족 남연군의 아들 흥선군은 부친 무덤을 충청도 덕산으로 이장했다. 한 지관이 ‘무덤 주인은 화를 입겠지만 천자가 두 분 나올 땅’이라 했기 때문이었다. 과연 흥선군의 아들(고종)과 손자(순종)는 훗날 황제가 됐지만, 남연군 묘는 1868년 독일인 도굴꾼 오페르트 일당에게 파헤쳐졌다.
풍수와 택지(擇地)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듯한 이 두 이야기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 믿을 만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다. 훗날 임진왜란과 오페르트 도굴 사건이 일어나자 ‘도대체 왜 그런 일이 생겼나’를 돌이켜보는 과정에서 윤색된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 당연하고도 합리적인 일이다.
하지만 일부 사람은 21세기 인공지능의 시대에도 여전히 ‘땅만 잘 고른다면…’이란 유혹을 떨치지 못하는 것 같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집무실을 용산으로 옮기겠다고 하자 ‘풍수나 무속 때문에 저러는 거 아니냐’는 비난을 하고, 기자회견장에서조차 그런 질문이 나왔다. 여당 비대위원장은 “용산은 청나라·일본 군대가 주둔했던 오욕의 역사가 있는 곳”이란 말까지 했다.
과연 그런가? 그렇게 따지면 청와대 부지는 1979년 대통령이 그 앞 안가에서 저격당했고, 1939년엔 총독 관저가 지어졌으며, 1895년엔 담장 하나 넘은 건청궁에서 왕비가 시해당한 ‘오욕의 장소’다. 현 정부와 인수위 모두 한때 이전을 고려했던 광화문은 또 어떤가. 1926년엔 그 뒤에 조선총독부 청사가 세워졌고, 1896년 아관파천 때는 그 앞에서 총리대신 김홍집이 군중에게 살해당하고 시신마저 훼손됐다.
도대체 어디가 길지(吉地)고 흉지(凶地)인가. 정작 풍수지리 전문가들은 “같은 땅이 관점에 따라 길지도 흉지도 될 수 있고, 풍수는 국가의 흥망과 인과관계가 있는 게 아니라 살아가는 방도로 유연하게 활용해야 하는 것”이라 말한다.
참담한 전란과 도굴 사건이 일어난 진짜 이유는 건물이나 무덤을 잘못 만들어서가 아니었다. 국제 정세 변화에 무지했고 국방과 외교에 소홀했기 때문에 당했던 것이다. 역대 청와대 입주자 대부분이 불행한 말로를 맞았던 이유는 터가 잘못돼서가 아니라 그들이 권력을 남용하고 소통에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길지’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며, 중요한 것은 정치의 성패(成敗) 여부다. ‘풍수’를 정치와 연결해 악용하는 일은 그만둘 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