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벌집과 서민연금은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됩니다.”(50대 최모씨)
보건복지부와 건강보험공단이 최근 연금저축·퇴직연금 등 사적 연금을 건보료 부과 대상으로 검토하겠다고 밝히면서 예비 은퇴자들이 들끓고 있다. 지금은 피부양자 자격을 따지거나 건보료를 매길 때 공적 연금(국민·공무원·사학·군인 등)만 부과 대상으로 잡는다. 노후 연금 제도가 아직 안착하지 않은 상황을 고려해, 정부는 사적 연금을 건보료 부과 소득으로 반영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감사원이 건강보험 재정 악화 요인 중 하나로 사적 연금을 지적하자 주무 부처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구체적인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불감청 고소원(不敢請 固所願)’은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 사적 연금 지급액은 지난 2020년에만 3조원에 이르며 빠르게 증가하는 중이다. 앞으로 지급될 연금저축 적립액은 지난해 160조원에 달했다.
감사원은 지난달 펴낸 ‘건강보험 재정관리 실태’ 감사 보고서에서 공적 연금과 사적 연금의 건보료 부과 체계가 다른 것은 가입자 간 형평성에도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감사원에 따르면 59세 H씨의 사적 연금 소득이 연 1억5300만원이었는데, 사적 연금은 건보료 부과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H씨는 피부양자 자격을 유지했고 건보료를 한 푼도 내지 않았다. 만약 사적 연금이 공적 연금처럼 건보료 부과 대상이었다면, H씨는 월 39만원씩 건보료를 냈어야 했다.
감사원은 가입자 형평성과 건보 재정 확충이란 명분을 내걸어 제도 개선을 조치했다. 하지만 노후 전문가들은 “충분한 검토 없는 사적 연금 건보료 부과는 국가적 재앙을 부를 수 있다”고 경고한다. “공적 연금은 정부 지원이 있으니 건보료 부과에도 국민이 수긍하지만 사적 연금은 개인이 자발적으로 넣는 데다 납입 시점에 원금에 대해 건보료를 냈기 때문에 늙어서 또 건보료를 내야 한다면 이중과세 논란이 생긴다”(차경수 투자자산운용사)는 것이다.
퇴직연금의 건보료 부과 가능성을 둘러싸고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은퇴 후에 평생 나눠 받는 퇴직연금에 건보료가 붙는다면, 건보료 부담이 없는 일시금 수령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퇴직금을 한꺼번에 찾아 다 써버린 노인들은 정부 지원(기초연금)만 바라니 국가 재정이 더 축날 뿐이다.
대한민국 건강보험 체계가 아무리 좋아도 과정에 있어서의 모순까지 정당화될 순 없다. 건보 재정 확충이 필요하다면, 외국인의 건보 무임승차, 일부 병원들의 거짓 청구와 건강보험증 부정 사용부터 손봐야 한다. 복지부 관계자는 “사회적 논의를 거쳐 결정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벌써부터 사적 연금 불입을 당분간 중단하거나 포기하겠다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다.
반면 기획재정부는 최근 사적 연금인 연금저축·퇴직연금의 세액공제 한도를 종전 700만원에서 900만원으로 높이겠다고 발표했다. 정부 정책이 서로 상충되고 엇박자가 나면 곤란하다. 세제 혜택이라는 당근을 내세워 연금 가입을 유도하고선, 나중에 건보료로 회수해 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