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살다 온 국내 기업 경영자는 현지에서 월셋집 구하기가 무척 까다로웠다고 했다. 그는 “자산, 소득을 증명하는 걸로 모자라 회사 홈페이지까지 보여줬다”고 했다. 기자도 파리에 특파원으로 갔을 때 비슷한 고충을 겪었다. 현지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집주인들이 깐깐한 건 월세 지불 능력을 검증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세입자는 매년 월세를 조금 올려주긴 해도 제 발로 나갈 때까지 거주할 수 있다. 한 집에서 37년째 사는 세입자도 봤다.
문재인 정부가 ‘2+2년’ 거주가 가능하도록 임대차 제도를 바꾼 건 ‘유럽처럼 세입자가 오래 거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도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그들은 거주 기간을 늘리는 데 집중한 나머지 월세와 전세의 근본적인 차이를 뒷전에 뒀다. 단순한 ‘지불 거래’ 방식인 서양식 월세와 ‘사(私)금융’ 성격인 한국식 전세의 차이점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전세 계약을 맺으면 세입자는 집주인에게 수억원대의 거금을 빌려준 채권자이고 집주인은 채무자다. 전세금의 흐름으로 보면 세입자가 돈 받아야 할 권리를 가진 쪽이다. 이런 권리 행사에 문제가 없어야 전세 제도가 굴러간다. 어떤 집을 임차할 때 거주 기간이 길더라도 전세금을 돌려받을 확률이 낮다면, 이를 받아들이는 세입자는 없을 것이다.
전 정부는 세상을 강자와 약자로 단순 도식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강자의 힘을 제약해야 약자가 보호된다고 봤다. 세입자를 약자로만 보기 때문에 거주 기간을 늘려주고 가격을 억누르면 득이 된다고 여겼다. 정작 세입자에게 가장 중요한 채권자로서의 권리를 강화하는 방안은 임대차 3법에 담지 않았다. 전월세신고제를 도입하긴 했지만 그건 가격 통제에 방점이 찍힌 제도다.
요즘에는 전 정부가 간과한 전세 제도의 가장 위험한 불안 요인이 사회적 문제로 불거지고 있다. 집값·전셋값이 동반 하락해 이른바 ‘깡통 전세’가 많아져 임대차 시장에 충격이 왔다. 전세금을 떼일까 봐 벌벌 떠는 세입자가 많다. 빌라를 500여 채 지은 뒤 약 1000억원의 전세금을 받아 잠적한 사례마저 나왔다.
게다가 전세금을 제대로 돌려받지 못할까 봐 월세·반전세를 선호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이 때문에 전세 시세가 추가 하락해 기존 세입자가 전세금을 반환받는 데 애로를 겪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 임대차 3법은 집값·전셋값이 오르기만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도 문제다. 시세가 내릴 때도 있고, 그러면 ‘깡통 전세’ 문제가 심각해진다는 시장의 변동성을 간과했다.
지난 정부는 임대차 3법으로 나라를 흔들어 놓았지만 정작 주택 임차 시스템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개선하지는 않았다. 강자와 약자의 이분법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세계를 들여다보면 놓치는 게 생길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