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마이크로소프트 시어터에서 열린 제74회 에미상 시상식에서 '오징어 게임'으로 드라마 부문 감독상을 받은 황동혁 감독이 수상소감을 말하고 있다./AP 연합뉴스

미 에미상 6관왕에 오른 ‘오징어게임’의 황동혁 감독은 ‘늦깎이 감독’에 가깝다. 요즘 젊은 영화인들이 선호하는 한국예술종합학교나 봉준호·최동훈 감독을 배출한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이 아니다. 국내 대학에서 학부 과정을 마친 뒤 서던캘리포니아대(USC)에서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 뒤늦게 유학을 떠났다. 이 학교는 ‘스타워즈’의 조지 루커스와 ‘포레스트 검프’의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 등을 배출한 영화 명문이다.

대학 시절 같은 학과에서 함께 공부한 인연으로 그를 가까이서 지켜봤다. 그의 자취방에서 새우깡을 안주 삼아 소주를 나눠 마시고 잠들었다가 아침에 깨면 좁은 방구석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건 소설책과 시집들이었다. 그는 영화 지망생 이전에 문학청년이었다.

황 감독이 소설가 김훈의 원작을 영화화한 2017년 ‘남한산성’의 문향(文香) 가득한 대사에도 청춘의 흔적이 녹아 있다.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사옵니다” “모진 겨울을 견뎌낸 것들이 그 봄을 맞을 테지요”…. 당시 황 감독은 최명길(이병헌)의 대사들도 원작을 크게 손보기보다는 최대한 살리는 편을 택했다. 예전 인터뷰에서 이유를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소설에서 말이 지닌 힘과 아름다움을 그대로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요즘 사극처럼 쉽게 풀어 쓸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굳이 김훈의 소설을 택할 이유가 없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황 감독이 유학을 떠나기 전 대학 선후배들에게 ‘유학 자금을 후원해달라’고 부탁한 일화도 기억난다. 이전까지 틈틈이 촬영했던 습작 단편들을 공개하면서 “지금 내게 투자하면 나중에 몇 배로 돌려받을 것”이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유학 자금을 당당하게 투자 받겠다는 배포도 놀라웠지만, 실제로 선후배들이 그의 말을 믿고 수십만 원씩 갹출한 것도 돌아보면 믿기지 않는 풍경이다. 당시 통 크게 ‘투자’하지 못한 이 못난 감식안을 지금은 후회한다.

그렇게 힘들게 영화를 공부한 황 감독은 2004년 단편 ‘기적의 도로(Miracle Mile)’가 국제 영화제에서 호평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감독의 길을 걸었다. 장편 데뷔작인 ‘마이 파더’(관객 90만명)는 참패에 가까웠지만, 그 뒤 ‘도가니’(466만명) ‘수상한 그녀’(866만명) ‘남한산성’(384만명)을 통해서 흥행 감독으로 거듭났다. 시사회에도 예전 그의 ‘투자자’였던 선후배들을 초청했다.

황 감독은 ‘사연팔이’를 그리 반기는 편은 아니다. 그럼에도 오래전 추억을 꺼낸 이유가 있다. 자신의 길을 조금은 뒤늦게, 힘들게 시작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묵묵히 걷다 보면 크든 작든 결실을 보는 날이 언젠가 온다. 지금의 고된 청춘들에게도 황 감독의 문학청년 시절을 전해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