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8일(현지 시각) 설립 100주년을 맞은 영국 공영방송 BBC사옥./AP 연합뉴스

영국 공영방송 BBC의 ‘더 페이퍼스(The Papers)’는 다음 날 조간 신문의 주요 기사를 시청자에게 미리 전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지난 24일 시작과 함께 화면에 등장한 진행자 마르틴 크록솔은 “이 모든 것이 매우 흥미롭지 않나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기뻐해도 될까요? 될 것 같네요”라며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었다.

이날 방송은 보리스 존슨 전 영국 총리의 보수당 대표 경선 불출마 소식이 전해진 직후 전파를 탔다. 크록솔은 동료 진행자에게 “신문 최종판에 최신 소식을 반영하려면 시간이 촉박할 것 같다”고 말해 자신의 오프닝 멘트가 존슨 전 총리의 낙마를 뜻하는 것임을 시사했다.

그는 텔레그래프 기자인 토니 그루가 “존슨은 자신을 2024년 영국 총선은 물론 미국 대선의 승리를 이끌 적임자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농담을 하자 폭소를 터뜨렸다. 그루 기자가 곧 부적절한 발언이라고 사과했고, 크록솔도 “나는 웃어선 안 됐다. 이렇게 깔깔거림으로써 마땅히 지켜야 할 ‘적절한 불편부당성(Due Impartiality)’을 어기고 있다”고 말했다.

방송이 나가자 시청자들과 보수당 의원 등은 크록솔이 공영방송의 공정성을 위반했다고 비판했다. 닐 오브라이언 보수당 하원의원은 “BBC가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다”고 트위터에 남겼다. 일부 시청자는 영국 미디어 규제 기관인 오프콤에 문제를 제기했다. 자체 조사에 착수한 BBC는 “우리는 최고 수준의 보도 규정을 반드시 준수해야 한다”고 밝혔다. 크록솔은 조사가 끝날 때까지 방송에서 배제될 예정이다.

총리 후보의 낙마 소식에 희희낙락한 공영방송 진행자가 자체 조사를 받는 영국의 모습은 왜곡 논란에도 꿋꿋한 한국 공영방송의 현실과 대비된다. MBC는 지난 11일 방송된 ‘PD수첩-논문저자 김건희’ 편에서 음성을 변조하고 실루엣으로 처리한 다수의 내부 제보자들을 등장시켰다. 하지만 이들은 대역이었으며, ‘재연 고지’도 하지 않아 심각한 왜곡이란 주장이 나왔다.

지난 9월 윤석열 대통령의 해외 순방 당시에도 공영방송을 통해 허위 정보가 여과 없이 흘러나왔다. KBS1라디오 ‘주진우 라이브’에 전화 출연한 탁현민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은 “정상들은 통상 오른쪽에 쓴다”며 윤 대통령이 조문록을 잘못 썼다고 꼬집었지만, 실제로는 당시 상당수의 정상이 윤 대통령처럼 조문록 왼쪽에 글을 남겼다. “베일은 장례식에서 로열패밀리만 쓰는 것”이라고 한 TBS ‘뉴스공장’ 진행자 김어준의 주장도 사실과는 달랐다. MBC는 제대로 들리지 않는 윤 대통령의 말에, 자체 해석한 ‘바이든’이란 자막을 달아 시청자들이 공정하게 받아들일 기회를 차단했다.

이런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면 크록솔의 웃음은 ‘애교’로 느껴진다. BBC의 보도 지침인 ‘적절한 불편부당성’은 사실상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우리나라 공영방송이 되짚어야 할 가치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