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작품(’엄숙한 시간’)엔 이런 구절이 있다. “지금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 세상에서 이유 없이 울고 있는 사람은/ 나 때문에 울고 있다...지금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죽어가고 있다/ 세상에서 이유 없이 죽어가는 사람은/ 나를 쳐다보고 있다.”
다른 사람 고통을 자기 고통처럼 느끼고 미안해하는 감정. 공감(共感)이라 부른다.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은 인간에게 공감이란 능력이 있었기에 협력하여 선을 이루고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분석한다.
이태원 참사 현장 인근에 마련된 애도 공간에 다녀온 많은 시민은 “(구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면서 추모 글을 쓰고 국화꽃을 놓았다. 자기들 잘못도 아닌데 그랬다. 이런 게 이웃의 비극에 공감하는 평범한 사람들 모습이다.
이 정부 고위 인사나 정치인들은 어땠나. 책임자들은 한참 늦게 사과했다. 그나마 떠밀려 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늦게라도 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진심이 아니란 낙인이 찍힌 뒤였다. 진정 잘못했다 느끼면 곧바로 사과가 나오는 게 인지상정인데. 그들은 달랐다.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듯 했다.
책임 있는 지도자라면 저절로 고개를 숙이기 마련이다.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 당시 서울시장은 “머리 숙여 500만 시민에게 사과를 드립니다...유가족과 이재민, 상처를 입은 시민들에게 거듭 사과를 올리며 시민 여러분 단죄를 기다리는 심정 간절합니다. 피와 눈물 어린 충정으로 사과 올립니다”라고 했다.
그전에도 이 정부는 어딘지 사과에 인색하다는 인상을 자주 줬다. 이를 두고 법조계 인사는 “(정부 고위직에)법조인이 많아 그렇다”고 해석했다. 법정에서는 사과를 하면 혐의를 시인하고 책임을 지겠다는 뜻으로 간주돼 불리해지기 때문인데 그 습성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사고를 내도 먼저 사과하지 말라”고 조언하는 변호사가 있다는데 이 정부 인사들이 다 그런 식이다. 실제 그렇지야 않겠지만 요즘 이 정부 고위 인사들 발언을 보면 그런 지침(먼저 사과하지 말라)이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법정에서야 책임을 인정하는 게 불리할지 모르겠지만 정치에선 그 반대일텐데 아직도 모르는 걸까.
대통령 비서실장이 “사건이 터질 때마다 장관 바꿔라, 청장 바꿔라 하는 요구는 후진적이다. 사람을 바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다음엔 어떻게 할 건가”라고 반발한 대목도 답답했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발언이긴 하다.
하지만 과거 숱한 대형 사고가 터졌을 때 책임을 통감하고 자리에서 물러난 공직자들은 ‘후진적’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헌법에도 나와 있듯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의 고난에 대해 책임을 지는 존재다. 국민에게 큰 피해가 생겼으면 무한 책임을 느끼란 취지를 담고 있다. 적어도 국민 눈에 그렇게 보이게 행동하란 의미다. 그래서 사퇴한 것이다. 이번 사고 후 많은 공직자들이 책임 회피성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는데, 비서실장이 안 하느니만 못한 발언을 보태는 걸 보면 참담하다.
공감의 배신, 공감의 역설이란 말이 있다. 공감이 외집단이 아닌 내집단, 그러니까 자기편에게만 향하면 어떤 경우에는 (외집단을 향한) 차별과 혐오로 바뀔 수도 있다. 우리 편 아픔에는 공감하지만 상대편 아픔에는 무감각하고 무관심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런 공감은 되레 독이다. 이 정부 많은 인사들은 저런 공감력만 가진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보는 것에는 경계가 있네/ 그리고 아주 깊숙하게 바라본 세계는/ 사랑 안에서 피어나길 원한다네/ 두 눈의 일은 다하였으니/ 이제 가서, 마음의 일을 하라/ 네 안에 갇혀 있는 모든 이미지를/ 깊이 바라보라”(라이너 마리아 릴케 ‘전환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