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학과 존폐 공방은 바둑의 가치 혹은 효용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계기를 제공한다. 바둑이란 게임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외형적으론 그저 수십, 수백종에 이르는 보드게임 중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무판에 흑백 돌을 얹어놓는 놀이”라는 서봉수 9단의 풀이는 언제 들어도 유쾌하다. 젊은 시절 익살스럽게 내던졌던 말이지만 이보다 더 근사한 설명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공강 시간을 활용, 휴게실에서 대국에 한창인 명지대 바둑학과 학생들./명지대

바둑은 태생부터 신비에 싸여 있다. 고대 중국 요순 시대 창시설, 티베트 기원설 등 여러 설이 있지만 정답은 누구도 모른다. 요순 기원설을 따른다면 바둑의 나이는 4000년도 넘는다. 주의 깊게 볼 것은 그동안 바둑이 누려온 지위다. 중국 당나라 때 임금들은 기대조(棋待詔)란 이름의 바둑 전문 관직을 두어 바둑을 관장하고 유포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바둑부 장관쯤 될 것이다.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 시절부터 바둑을 국기(國技)로 제정하고 전문 기사들에게 녹봉을 주며 육성했다. 이것이 본인방(本因坊) 등 4대 가문 경쟁으로 이어지면서 바둑 르네상스의 발판이 됐다. 중국과 일본 권력자들은 왜 그토록 바둑을 우대했을까. 종횡 19로(路) 바둑판 위에서 눈부시게 구현되는 천변만화의 오묘함에 매혹돼 통치 철학에 접목한 것이다.

동양에만 그치지 않았다. 딥마인드 대표 데미스 허사비스는 인간의 뇌를 능가하는 인공지능을 창조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랍지만, 그를 진정한 천재라고 인정하게 만든 대목은 따로 있다. 인간과 기계가 샅바 잡고 우열을 가릴 모래판으로 바둑을 택했다는 점이다. 보드게임 천국인 서구에서 바둑은 주류 아이템이 전혀 아니다. 게다가 허사비스는 13세 때 세계 유소년 체스대회서 2위에 입상했을 만큼 체스와 인연이 깊다. 왜 그는 인공지능을 처음 선보이는 야심 찬 무대를 바둑으로 꾸몄을까. 무한대에 가까운 바둑의 수(手)와 스케일, 깊이를 통해 우열을 가려보겠다는 의도였다.

근세 한반도에서도 바둑이 꽤 성행했다. 하지만 중·일과 달리 사랑방 소일거리에 머물다 보니 경기력에서 두 나라를 당할 수 없었다. 1980년대 말 처음 세계대회가 열렸을 때 한국은 고작 1~2명만 초청받을 만큼 푸대접을 받았다. 숱한 설움을 겪다가 세계 바둑 최강국으로 올라선 과정은 불가사의에 가깝다. 여러 요인 중 명지대 바둑학과를 빼놓을 수 없다. 1997년 창설된 이 세계 유일 학과가 국내외 바둑계 구심점으로 떠올라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런 기반이 없는 경쟁국들은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명지대 바둑학과가 폐과 수순을 밟고 있다.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지만 그간의 화려했던 성과를 스스로 부정하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명지대의 ‘랜드마크’로 꼽히던 바둑학과가 어쩌다 요석(要石)에서 폐석(廢石)으로 변했는지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