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앨라배마주 별칭은 코튼 스테이트(Cotton State·목화의 주)다. 흑인 비중은 27%로 미국 평균의 두 배가 넘고 대개 목화밭에서 일하던 노예 후손이다. 연방의회·주지사·주의회는 백인 정치인이 장악한 공화당 초강세 지역이다.
이 정치 지형에 변화를 몰고 올 연방 대법원 판결이 최근 나왔다. 백인 중심 선거구 6곳, 흑인 중심 선거구 1곳으로 짜인 현재 주 선거구를 개편해 흑인 중심 선거구를 최소 2곳으로 늘리라는 것이다.
이변이었다. 대법관 9명 중 6명이 공화당 대통령이 임명한 이른바 보수 성향인데, 보수 대법관 2명이 흑인 유권자 쪽에 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그중 한 명이 존 로버츠 대법원장이었다. 선거법 전문가인 리처드 한센 UCLA 교수는 뉴욕타임스에 “반갑고도 놀랍다. 로버츠가 (예상치 못한) 커브볼을 던졌다”고 썼다.
그가 ‘보수’와 결이 다른 판결을 내린 건 처음이 아니다. 2020년 6월 대법원은 성차별 범위에는 생물학적 성별뿐 아니라 성적 지향성도 포함된다고 판결했다. 성소수자 권익을 획기적으로 신장한 판결이었는데 찬성표를 던진 6명 중 로버츠가 있었다. 또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절 불법체류청년추방유예제도를 폐지하려 하고, 불법월경자 망명 신청을 거부하려 하자 대법원이 제동을 걸었다. 두 사건 모두 로버츠가 반대 편에 섰다.
로버츠는 50세였던 2005년에 조지 W 부시 대통령에 의해 대법원장 후보자로 지명됐다. 하버드대 학부와 로스쿨을 최우등 졸업하고, 엘리트 판사 집결지 워싱턴 연방항소법원 판사로 근무한 그는 한국으로 치면 소위 ‘서오남(서울대·50대·남성)’의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인준 투표에서 반대표를 던진 22명 중엔 상원의원 버락 오바마도 있었다. 이후 대통령이 된 오바마는 정부가 전 국민 건강보험 가입을 책임지는 ‘오바마케어’를 도입했는데, 보수 진영에서 위헌 소송을 잇따라 제기했다. 그때마다 로버츠는 제도 취지가 옳다며 존치에 표를 던져 구원투수 역할을 했다. 진영 논리에 매몰되지 않는 대법원장이 이념의 균형추 역할을 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2018년 11월 당시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이민 정책에 제동을 건 연방 법원을 ‘오바마 판사들’이라고 비난하자, 로버츠가 “사법부에는 오바마 판사도, 트럼프 판사도, 부시 판사도, 클린턴 판사도 없다”며 반박 성명을 낸 것은 사법부의 위상과 권위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회자된다.
유감이지만, 한국 대법원은 지난 6년간 재판 지체, 이념 판결, 코드 인사 등 불쾌한 뉴스의 발원지였다. 이념의 균형추 역할을 하고 갈등 봉합의 최전선에 있어야 할 수장이 제 역할을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는 9월 새 대법원장이 임명된다. 그 판결에 존경과 신뢰를 보낼 수 있는 분이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