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천년사’라는 책이 있다. 2018년부터 2022년까지 광주·전북·전남의 호남권 3개 지자체가 예산 24억원을 들여 34권 1만3000여 쪽으로 만든 방대한 역사서다. 참여 학자만 200명이 넘는다. 그러나 이 책은 공개 직후 지역 시민단체와 광역위원 등으로부터 ‘역사 왜곡 사서’라는 거센 비판과 내용을 고치거나 폐기하라는 요구에 직면했다.
비판의 주요 이유는 고대사 서술에서 서기 8세기에 편찬된 일본 역사서 ‘일본서기’의 기술을 차용했다는 것 등이다. 이 기록은 일본이 고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說)’의 근거로 쓰였기 때문에, 결국 일본의 식민사관을 따른 왜곡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론 ‘기문국’이나 ‘반파국’처럼 ‘일본서기’에 나오는 지명이 호남에 있었다고 썼으며, ‘임나 4현’이란 용어를 수록한 것 등이 문제가 됐다. “전라도 정신을 되새기기 위한 책에 ‘일본서기’의 지명을 쓰는 것은 전라도가 일본 지배 속에 있었다고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란 말까지 나왔다.
과연 그런가? 공람을 위해 인터넷에 공개 중인 ‘전라도 천년사’를 살펴봤지만 어디에서도 임나일본부설을 사실이라고 여긴 기술은 없었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 학계에서도 이미 폐기된 설로, 국내 역사학계에서 이걸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일본서기’란 책 전체를 금서(禁書)나 불온문서로 간주해 배척해야 하는가? 국내 학자들은 “일본 중심적인 황국사관의 왜곡을 걷어내면 중요한 팩트를 많이 찾아낼 수 있는 사서이며, 한국 고대사 서술에서 빠질 수 없는 자료”라고 말한다. 한반도에서 일본에 문화를 전해 준 왕인, 아직기, 노리사치계, 담징의 이름은 ‘일본서기’에서만 볼 수 있는데, 그럼 이들의 존재도 모두 일본 측의 왜곡이기 때문에 실존 인물로 보지 말아야 한단 말인가? 백제 유민들의 자료를 근거로 편찬된 ‘일본서기’의 모든 내용을 가짜 뉴스로 여기고 폐기한다면 이 책을 인용한 그 많은 학계의 고대사 논문과 저서도 없애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임나일본부’라는 것은 분명 허구지만 ‘임나(任那)’ 자체는 광개토대왕릉비문과 ‘삼국사기’ 강수열전에도 등장하는 실제 지명이었다. 이 지명이 한반도에 있었음을 사실로 인정했다고 해서 ‘일본의 임나일본부 왜곡을 추종했다’고 모는 것이 말이 되는가. ‘전라도 천년사’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왜(倭)가 아닌 백제가 마한과 가야 방면으로 진출했다는 기록’으로 재해석했고, 이는 현재 우리 학계 주류의 의견과 일치한다.
한 역사학자는 이런 말을 했다. “무엇이든 반일(反日)을 내걸고 선동하면 먹혀드는 지금 분위기가 ‘전라도 천년사’에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후쿠시마 오염수 괴담의 문과판(版) 버전이 아닐까.” 이 같은 식의 압력이 시사(市史) 편찬을 앞두고 있는 다른 여러 지자체에도 나타날까 우려하는 사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