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22일. 김명수 당시 대법원장 후보자는 관용차 대신 시외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걸어서’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로 들어왔다. 그는 “31년 5개월 동안 법정에서 재판만 해 온 사람”이라며 “어떤 수준인지, 어떤 모습인지 보여드릴 것”이라고 했다.
‘버스 출근’으로 탈(脫)권위를 표방했던 김명수 대법원의 상징은 이제 ‘재판 지체’와 ‘거짓말’이 됐다. 처리 기간이 2년을 넘는 장기 미제가 민사 1심 기준 세 배 가까이 늘었고, 현직 판사가 언론 기고로 ‘재판의 실패’를 공식화했다. 국회 탄핵을 거론하며 후배 판사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고도 이를 부인했던 김 대법원장은 거짓말로 검찰 수사까지 받게 됐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보다 무서운 것은 조직의 동력이 사라진 점이다. 개개인이 헌법기관인 판사들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는 상사가 아니라 ‘후임자’라고 한다. 전임자가 남긴 기록을 보고 그가 사건 처리를 제대로 했는지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판사들은 후임자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일했다. 자기가 재판을 마친 사건은 2월 정기 인사 전 판결문을 쓰고 떠나는 게 기본이었다. 동료 집단 압력(peer pressure)의 힘이다.
그런데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에서는 동료 집단 압력이 사라져 버렸다. 복잡하거나 민감한 사건은 질질 끌고, 판결문을 후임자에게 떠넘긴다. 12월에 선고 예정인 사건을 2월로 연기하고, 2월엔 인사 이동해버리는 식이다. 배석판사들은 1주일에 세 건만 선고하겠다고 ‘담합’을 하고, 개탄하던 부장판사들도 이를 핑계로 워라밸에 젖어들었다. 한 고법 판사는 “놀먹판(놀고먹는 판사)이 하도 많아 누굴 집어서 욕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이는 김명수 대법원이 사법 관료화를 없앤다며 법원의 평가 시스템을 무의미하게 만든 탓이 크다. 고법부장 승진제도 없어지고 법원장은 투표로 뽑는 법원에서는 근무 평정도, 동료 집단의 평가도 별로 의식하지 않게 됐다. 재판 잘하는 판사 대신 대법원장과 뜻을 같이하는 판사들이 좋은 자리에 가면서 행동 규범이 무너졌다.
그런데도 김명수 대법원장은 마지막 기자간담회에서 “법관이 승진 제도가 있을 때 성심을 다하고 (승진 제도가) 없다고 그렇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자기의 인사 방침을 정당화했다. 재판 지체 중 당사자가 사망하기도 하는 상황에서 “신속한 재판보다 국민에게 감동을 주는 재판”을 강조했다. 검찰 수사에 대해선 “수사가 정당한 절차로 진행되면 성실히 임할 것”이라며 ‘조건’을 달았다. 판사들 사이에서는 “정신 승리를 넘어 엽기 수준”이라는 독한 비판도 나온다.
한 부장판사는 “지난 6년이 떳떳하다면 퇴임 후 당당히 대법원 정문을 걸어 나가라”고 했다. 문 밖에 있는 게 검찰 수사이든 무엇이든 ‘조건’을 달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시작과 끝이 같은 일관성이 지금 김명수 대법원장에게 기대할 수 있는 마지막 미덕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