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새미 리 박사 의료·보건 과학 매그닛 학교’라는 초등학교가 있다. 매그닛 학교는 특정 분야 인재 조기 육성을 위해 특화된 학교로 1948·1952년 올림픽에서 우승한 한국계 다이빙 선수 새미 리(1920~2016)에서 교명을 땄다. 미국이 배출한 수많은 올림픽 메달리스트 중에 이름이 공립학교의 이름이 됐다는 것은, 삶의 궤적이 국가와 지역사회의 본보기로 존경받았다는 뜻이다. 같은 도시에는 ‘새미 리 광장’도 있다.

초기 하와이 이민자 아들로 태어난 새미 리는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계 미국인 올림픽 우승자이면서 이비인후과 의사다. 열두 살 때 고향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올림픽 경기를 지켜보며 다이빙 선수에 대한 꿈을 키워갔다.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시기 소수 인종에게 주 1회만 입장이 허용되던 수영장에서 다이빙 연습을 하며 기량을 키웠다. ‘엄친아’라는 말이 어울리는 그의 인생 이력의 중심에 군(軍)이 있다.

2차 대전기였던 학부 시절 장교 후보생이 돼 학비를 지원받아 남가주 의대에 진학했고, 졸업 후 군의관이 돼 선수 생활을 병행했다. 올림픽 2연패에 도전하던 1952년 헬싱키 올림픽 당시엔 6·25 참전 병력에 배속된 의무장교(소령)였다. 그는 전시 상황을 감안해 올림픽 포기도 고려했지만, 소속 부대는 그가 미국 대표로 출전할 수 있도록 한 달 특별휴가를 줬다.

1955년까지 주한미군으로 복무한 그는 1953년 유색인종 중 처음으로 최고 아마추어 선수에게 수여하는 제임스 설리번상을 받았다. 이듬해 국무부 친선대사로 아시아 각국을 순방했다. 1956·1972·1988 등 세 차례 올림픽에 미 대통령 특사로 파견됐다. 1968년에는 국제 수영 명예의 전당, 1990년에는 미 올림픽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올랐다. 그가 역대 올림픽 우승자 중에서도 각별한 예우를 받았던 것은, 제복 입고 헌신하는 이들을 우대하는 미국 사회 풍토도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항저우 아시안게임의 치열한 메달 레이스를 보면서 새미 리가 문득 떠올랐다. 고된 훈련과 혹독한 담금질의 결과로 국위를 선양했기에, 우리 선수들이 획득한 메달은 색깔에 상관없이 모두 값지다. 하지만 우승자에게만 병역 면제 혜택을 주는 오랜 규정으로 인해 메달이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인식되는 구도, 그 점을 집요하게 파고든 외신들의 취재 공세는 씁쓸함을 남긴다.

73년째 전쟁 중인 국가에서 아시안게임 메달 색깔과 올림픽 메달 획득 여부에 따라 군 복무 여부가 결정되고, 그 결과에 희비가 엇갈리는 모습이 되풀이되는 상황을 언제까지 봐야 할까. 메달 획득만큼이나 군 복무도 자랑스러운 애국이라는 점을, 군 복무 중이거나 군대를 다녀온 메달리스트들이 더 많아지도록, 그래서 한국판 새미 리가 더 많이 나올 수 있도록 체육과 병역 정책 담당자들이 더 치열하게 고민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