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헤즈볼라 지지자들이 레바논 베이루트 남부 교외에서 열린 '순교자의 날' 행사에서 대형 스크린을 통해 하산 나스랄라의 연설을 듣고 있다./EPA 연합뉴스

레바논의 이슬람 무장 단체 헤즈볼라를 32년째 통치 중인 최고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가 최근 자체 TV 채널에 등장했다.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해 전쟁이 발발한 뒤, 헤즈볼라도 이스라엘을 공격하며 사실상 참전한 데 대한 입장을 밝히는 자리였다.

그는 “이스라엘은 미국의 도구”라며 둘을 적으로 묶고 “근본적 책임은 이들에게 있다”고 했다. 미국을 겨냥해 “1980년대 너희의 계획을 좌절시켰던 이들 대부분이 자식·손주들과 잘 살고 있다”고 했다. 300여 명의 목숨을 앗은 1983년 레바논 주재 미국 대사관 및 군 막사 폭파 사건 등 자신들이 주도한 과거 테러를 언급하며 위협한 것이다.

그는 “레바논 주권과 안보를 훼손하려는 어떤 시도도 단호한 저항에 직면할 것”이라는, 국가 지도자가 할 법한 말도 했다. 그러나 헤즈볼라는 서방은 물론이고 이슬람 국가들로 구성된 걸프 협력 회의나 아랍 연맹에서조차 테러 단체로 지정돼있다. 이렇게 일개 무장 단체 우두머리의 활보 뒤에 레바논 정부의 존재감은 초라하다. 위기에서 중심을 잡아야 할 국가 원수인 대통령은 선출권을 가진 의회 내분으로 13개월째 공석이다. 나지브 미카티 과도정부 총리는 외신 인터뷰에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대해 “폭풍 한가운데 있다”며 무력감을 토로했다.

이처럼 헤즈볼라가 민주적으로 구성된 레바논 정부의 존재감을 압도하는 상황은 역설적이게도 ‘민주주의’이기에 가능했다. 레바논은 주변국과 달리 서구 의회 민주주의가 일찍 도입됐다. 옛 식민 통치국 프랑스 영향도 있었지만, 전체 인구의 40%가 기독교인이라 이슬람 전제정치가 뿌리내리기 힘든 구조였다. 1980년대 무차별 테러로 국제사회 공적이 돼 존립위기에 몰린 헤즈볼라는 새 생존 전략을 세웠다. 정당의 얼굴을 하고 기성 정치에 진입하는 것이었다. 근거지 남부에서 상당한 지지세가 있던 이들은 꾸준히 총선에 후보를 내다가 2005년 총선에서 14석을 얻었고, 내각에도 장관 두 명을 진출시키며 유력 정당으로 발돋움했다. 그렇다고 무장 단체 본질을 버린 것도 아니어서, 이스라엘과는 수차례 충돌을 이어갔다. 특히 이들이 2008년 레바논군 헬기에 오인 사격을 가해 조종사가 목숨을 잃었는데도,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은 것은 존재감을 극대화하는 계기가 됐다.

레바논의 상황은 10년 전 한국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선거를 통해 정당으로 국회에 입성한 반국가 세력의 내란 음모가 드러났고, 지난한 사법 처리·정당 해산 절차 끝에 퇴출됐다. 하지만 잔당과 추종 세력이 정당 형태로 선거를 통해 재기하려는 징후가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민주주의 제도가 국가 존립을 위협하는 흉기로 악용될 수 있다는 사례를 두 나라의 상황이 보여준다. 총선을 다섯 달 앞둔 시점에서 우리의 민주주의가 반국가 세력에 악용될 위험이나 약점은 없는지 살펴봐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