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는 34년 전 원전 가동을 전면 중단한 나라다. 그런데 세계원자력협회(WNA) 보고서에는 이탈리아에서 소비되는 전력의 6%가 원전에서 만들어지고 있다고 적혀 있다. 탈원전 국가에서 여전히 원전발 전기를 쓴다는 역설은 무슨 뜻일까.
1986년 체르노빌 사고를 계기로 이탈리아는 국민투표를 거쳐 1990년 모든 원자로를 닫았다. 속전속결이었다. 대신 뜨거운 지중해 햇빛을 활용해 태양광 발전을 끌어올리려고 무진 애를 써왔다. 그래 봐야 이탈리아의 전기 에너지원 가운데 태양광 비율은 9.8%에 그친다. 아직은 효율이 낮기 때문이다.
원전의 빈자리를 메우고 태양광의 한계를 극복하려면 화석연료를 쓰지 않을 수 없다. 이탈리아는 전력 생산의 48.4%를 천연가스에 의존한다. 문제는 필요한 분량의 90% 이상을 러시아·알제리·카타르 등에서 수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막대한 비용 청구서가 날아든다.
천연가스 수입에 재정을 쏟아부어도 전력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해 전기 자체도 외국에서 끌어와야 한다. 이탈리아가 2022년 전기를 수입하느라 지불한 돈은 16조원대에 달했다. 유럽 최대 전기 수입국이다. 이게 탈원전 이후에도 원전발 전기를 쓸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전선이 연결된 이웃 나라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전기를 대량 수입하고 있는데, 두 나라는 여전히 원전을 많이 가동하기 때문이다.
에너지 수급에 실패한 짐은 국민 몫이다. 글로벌 에너지 정보업체 GPP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 이탈리아의 가정용 전기요금은 kWh당 0.452달러다. 우리나라(0.131달러)의 3.45배다. 같은 양을 써도 한국인이 10만원 낼 때 이탈리아인은 34만원 넘게 내야 한다는 얘기다.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는 이탈리아 정부는 최근 탈원전 정책 폐기를 선언하고, 원전을 다시 짓기로 했다. 이런 전환이 이뤄진 배경에는 체르노빌 사고 이후 태어난 이탈리아 MZ세대에게 이렇다 할 사고 기억이 없다는 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에너지 수급 계획이 실패하면 혹독한 대가를 치른다. 재정난을 부를뿐 아니라 가계에 치명타를 가한다. 산업용 전기료가 비싸지면 기업 활동에 족쇄가 채워진다. 앞으로 AI 시대가 본격화되면 전력 수요는 폭발하게 된다. 국가의 흥망성쇠를 전력 수급이 좌우하는 세상이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해의 강풍을 활용한 풍력발전을 키우려고 안간힘을 써온 영국도 다시 원전을 늘리기로 했다.
우리 국민들에겐 지난 정부가 멀쩡한 원전을 서둘러 가동 중단시키려는 자해극을 벌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 무모한 방향의 역주행을 이어갔다면 우리도 이탈리아의 전철을 밟았을 가능성이 짙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탈리아는 비용 투입만 감수하면 프랑스·스위스에서 손쉽게 전기를 수입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르다. 사방이 바다와 북한으로 막혀 있는 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