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 김동철 한전 사장은 정부세종청사를 찾아 “동서울 변전소 증설을 불허한 하남시를 상대로 이의를 제기했으며, 다음 달 행정소송과 행정심판을 제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 21일 하남시가 전자파에 따른 주민 건강 우려 등을 이유로 동서울 변전소 증설 공사를 허가하지 않자 법의 판단을 받겠다는 것이다. 김 사장은 하남시가 문제로 삼은 전자파 위험에 대해 “한전 직원들은 24시간 변전소에서 일하고, 직원이 가족과 지내는 사택도 변전소 부지에 있다”며 “전자파 괴담은 흑색선전”이라고 일축했다.
한전은 하남시의 불허 결정 이후 잇달아 기자회견과 간담회를 가지며 공세의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이른바 구전난(求電難)의 시대를 맞아 AI(인공지능), 반도체 등 국가 첨단 산업을 뒷받침하기 위해 전력망 건설이 시급하지만, 전국 곳곳에서 송배전망 건설이 지역 주민의 반대와 지방자치단체의 인허가에 막혀 수십 개월씩 지연되자 총력전을 펼치는 것이다.
그런데 바삐 움직이는 한전과 달리 하남시는 불허 결정 이후 일주일이 넘도록 가타부타 아무런 말이 없다. 불허 결정이 당당하고, 한전의 공세가 억울하다면 변명이라도 할 법하지만 조용하다. 2022년 지방선거에서 하남시장에 당선된 이현재 시장은 이 지역에서 19대와 20대 국회의원을 지낸 지역 정치인이자 그에 앞서 상공부와 산업자원부 등에서 공무원 생활을 한 산업·에너지 전문가다. 한전이 주장하는 ‘전자파의 비유해성’이나 AI 시대를 맞아 확대되는 전력망 건설의 국가적인 중요성을 모를 리 없는 인물이다. 이 시장의 하남시가 내린 결정을 두고 주무 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 내에서 “다 알 만한 분이 너무하다”는 반응이 나오는 이유다. 전력 업계에서는 무응답으로 일관하는 하남시를 두고 “과학이나 데이터에 근거하지 않고, 여론의 눈치만 보고 내린 결정이었다는 방증 아니겠느냐”는 비판마저 나온다.
불허 결정을 앞둔 이달 초엔 하남이 지역구인 추미애 의원이 주민들에게 보낸 의정 보고 문자에서 “감일 변전소 증설을 결사반대하고, 하남시의 인허가를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는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이를 두고서도 6선 의원으로 국회의장에도 도전했던 거물급 정치인이 국가 현안보다는 지나치게 지역 정서에만 파묻혔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변전소 증설로 하남 지역의 전기 공급 능력은 20%가량 확대된다. 전기를 대규모로 소비하는 수도권 지자체마저 전력망의 신·증설을 막는다면 앞으로는 그 어디에도 이 같은 설비를 지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무더웠던 올여름, 많은 사람이 에어컨 바람에 감사함을 느꼈다. 하지만 비과학적인 주장에만 귀 기울인 채 ‘내 뒷마당에는 안 된다’는 지역 이기주의가 판을 친다면 이젠 그 에어컨을 돌릴 전기를 만들고 옮기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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