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이사회 정상회의에서 참석자들이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신화 연합뉴스

지난 17일부터 이틀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유럽연합(EU) 정상회의가 열렸다. 27회원국 정상들은 불법 이민자 송환을 비롯한 이민 정책을 논의하기 위해 모였지만, ‘무너지는 유럽 경제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를 놓고도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눴다.

EU는 2020년 코로나 사태 충격 탓에 -5.6%라는 처참한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가 2021년 6.3%로 반등했다. 하지만 2022년 3.5%로 성장세가 꺾이더니 작년에는 불과 0.4%의 성장률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유럽의 ‘맏형’ 격인 독일부터 불황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지난해 -0.3%로 역성장한 독일은 올해도 성장률이 0.2%에 그칠 전망이다.

유럽이 비틀대는 이유로는 단기적으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가 크다. 하지만 좀 더 넓혀 보면 이상적 목표를 추구하던 유럽 경제가 현실에서 구조적인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특히 탄소 감축과 같은 이상(理想)에만 목을 매다 산업 기반이 흔들리는 결과를 낳았다는 비판이 크다.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전 폴란드 총리는 지난달 미국 매체 폴리티코 기고에서 “우리는 환경주의라는 허상 속에 살고 있었다. 우리는 전 세계 탄소 배출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일자리와 이익, 원자재 주권을 내주고 있었다”고 자책했다.

산업 경쟁력이 하락하는 속도가 빨라지자 요즘 유럽에서는 이상적 가치를 수정하자는 목소리가 커진다. 친환경 규제를 앞장서 이끄는 독일에서마저 “2035년 내연기관 차량 금지 정책을 폐지하자”는 주장이 나온다. 이미 독일의 주력 산업인 자동차는 전기차 세계에서 2류로 뒤처졌다. 이젠 폴크스바겐, 메르세데스 벤츠가 독일이 아닌 중국에서 전기차 생산·개발에 나서는 실정이다. 스웨덴의 볼보나 영국의 재규어·랜드로버 같은 유럽 자동차 회사는 아시아 자본의 손에 이미 넘어갔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그동안 유럽식 환경 보호와 두툼한 복지의 가치를 롤모델로 삼았다. 유럽식 가치 추종자들은 유럽에서 내놓는 정책을 글로벌 스탠더드로 받아들여 우리 스스로를 ‘자아비판’하기 바빴다. 이들은 수력과 태양광이 풍부한 유럽 국가와 비교해 왜 우리는 ‘더러운’ 화석연료를 많이 쓰느냐고 꾸짖고,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선 ‘공장을 멈추면 된다’는 식의 궤변을 늘어놓곤 했다.

이렇게 유럽식 가치를 추앙하던 사람들이 요즘엔 예전만큼 유럽을 따르자는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고 있다. 경제성장이 정체되고, 높은 청년 실업률에 시달리며, 직장인들의 실질 소득이 좀처럼 늘지 않고 있는 유럽을 예전처럼 본받자고 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걸 스스로 알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 우리 후대에게는 이상을 지향하되 현실 감각을 잃지 않는 현명한 경제 모델을 물려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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