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아버지가 일군 중소 식품업체를 물려받은 한 40대 여성 사장은 최근 일을 곧잘 하는 30대 직원에게 “회사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맡아 나를 도와주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가 거절당했다. “칼퇴근 하는 지금이 좋다. 미안하지만 주말까지 대표님 전화를 받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요즘 책임 있는 보직을 꺼리는 ‘언보싱(unbossing·보스가 되지 않으려는 것)’이 대·중소기업을 가리지 않고 확산되고 있다는 얘기를 현장에서 자주 접한다. 최근 현대차엔 대리 승진을 꺼리는 직원도 있다고 한다. 현대차에선 과장이 되면 노조에서 탈퇴해야 해 ‘만년 대리’를 원하는 직원들이 있었다. 그런데 최근엔 대리마저도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이다.
중소 제조 기업을 운영하는 50~60대 기업인들은 요즘 자녀들이 가업 상속을 원치 않아 걱정이 크다. “기름 냄새 나는 제조업은 싫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최근 싼값에 매물로 나온 기업을 중국 자본이 ‘줍줍’ 해가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대리부터 사장까지, 책임 있는 일은 회피하는 세상이다.
과거에 비해 경제적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재테크 수단이 늘었고, 직장 내 성공보다 일·가정의 균형이 더 중요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육체 노동은 로봇에, 지식 노동은 인공지능(AI)에 맡기자는 말까지 나오는 마당에 뭐라 나무라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럼 소는 누가 키우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아직 누군가는 초격차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 밤을 새우고, 전투기 개발을 위해 죽음을 각오한 시험 비행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논밭에서 땀 흘려야 식량이 나오고, 누군가는 제복을 입고 위험을 무릅써야 국민의 안전이 온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언보싱을 거론할 만큼 성장한 건 일에 대한 집념과 책임감, 주인의식을 가진 사람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임을 새삼 깨닫는다. 외화 벌이를 위해 독일에 파견됐던 광부와 간호사들, 사우디 폭염 아래 철근을 올렸던 건설 근로자들, 포항 영일만 모래 바람 맞으며 국내 첫 고로를 세운 그런 영웅들 말이다.
최근 트럼프 2기 ‘정부효율부’ 수장으로 내정된 일론 머스크는 “매주 80시간 이상, 무보수로 일할 혁명가들을 찾는다”는 공고를 냈다. 돈 한 푼 받지 않아도 나라를 위해, 꿈을 위해 헌신하는 가치를 아는 사람이 많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문득, 야근이 잦은 한 정부 부처 여성 과장이 “엄마는 왜 늘 집에 없느냐”고 묻는 어린 자녀에게 했다는 말이 떠오른다. “미안해. 하지만 엄마는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니 조금 이해해줘.” 세상에 모든, 각자 맡은 자리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이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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