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검찰총장은 지난 22일 대검찰청 국감에서 “대통령께서 총선 이후 민주당에서 사퇴하라는 얘기가 나왔을 때도 적절한 메신저를 통해 ‘흔들리지 말고 임기를 지키며 소임을 다하라’고 전했다”고 말했다.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는 현직 대통령의 비공식 메시지를 TV로 생중계되던 국감 현장에서 공개한 것이다. 여당 의원들은 “자리 보전을 위해 대통령을 끌어들였다”고 비난했다.
그 장면을 봤다면 가장 당황했을 사람은 문재인 대통령이다. 윤 총장 발언에 담긴 의미는 결국 “제가 마음에 안 들면 대통령께서 직접 목을 치시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과 윤 총장 간 관계는 여권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다층적이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 형성됐다. 문 대통령은 한때 윤 총장을 신줏단지 모시듯 했다. 윤 총장은 ‘박근혜 정부 적폐 수사’를 통해 문 대통령이 41% 득표로 집권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2012년 대선에서 패배한 문 대통령이 ‘억울한 패장(敗將)’이라고 그 진영에서 믿게 된 건 윤 총장이 밀어붙였던 ‘국정원 댓글 선거 개입’ 사건 수사 영향이었다.
윤 총장은 윤 총장대로 문 대통령을 ‘심성 착한 지도자’로 존중했고, ‘조국 수사’의 반작용으로 여권에서 ‘윤석열 퇴진론’이 나왔을 때도 그런 인식을 버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총선 이후 전달됐다는 ‘소임을 다하라’는 메시지는 여러 채널을 통해 전달됐다는 말이 들린다.
그러나 총선이 끝나고 폭주하기 시작한 정부·여당의 국가 운영, 6월 이후 자신을 겨냥한 추미애 장관의 세 차례 수사지휘권 발동, 여권 인사와 친여 매체가 합작한 인신공격성 공세 등을 겪으면서 문 대통령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다고 한다.
윤 총장이 대통령의 비공식 메시지를 공개한 것은 다분히 부적절하다. 그럼에도 문 대통령이 그에 반응해 윤 총장에게 나가라고 하긴 어려운 상황이다. 지금 이 시점에 윤 총장을 쫓아낸다면, 문 대통령으로선 “살아있는 권력에 엄정하라”고 윤 총장에게 당부한 것을 포함해 그동안 자신의 언행을 모두 뒤집어야 한다. “착하고 선한 이미지로 지지자들의 사랑을 받는 역할”(강준만 교수)을 해 온 문 대통령이 확실한 명분 없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본다.
윤 총장의 임기는 내년 7월까지다. 임기 말로 접어든 정권의 힘은 빠질 테고 검찰이 뉴스의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다. 이미 눌러 놨던 대형 비리 사건의 이면이 삐져나오고 있다. 라임 사건은 ‘피의사실 유포 금지’로 감춰졌던 여권 수사 상황이 재판을 통해 공개되는 단계에서 주범 ‘김봉현’이 검찰을 공격하는 옥중 편지를 공개했다. ‘물타기’란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옵티머스 사건도 청와대·여당 의원 등 정·관계 20여명 실명이 거론된 ‘옵티머스 리스트’를 서울중앙지검이 확보하고도 수사를 뭉갰다는 정황들이 드러났다.
촉(觸)이 빠른 검사들은 “라임·옵티머스 말고도 어떤 권력형 비리가 터져 나올지 모른다”고 한다. 라임 수사를 지휘했던 박순철 전 서울남부지검장이 “정치가 검찰을 덮었다”며 사표를 던진 것에서 볼 수 있듯, 검사들 분위기도 이전 같지 않다.
감사원이 자료를 이첩할 ‘월성 원전 조기 폐쇄’ 감사 결과에 대해서도 윤 총장이 수사 지시를 내릴 가능성이 크다. 검찰 내부에서는 “그걸 수사 안 하면 검찰이 아니다”라는 말이 벌써 나온다. 추 장관이 또 ‘사기꾼’을 등장시켜 윤 총장의 수사지휘권을 박탈할 수 있을까. 윤 총장의 정치 행보라고 공격하겠지만, 인사(人事)와 수사 방해를 통해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검찰을 정치화한 것은 이 정권이다. 윤 총장이 정치를 하고 말고는 내년 7월 이후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