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가 끝나자 이 현수막이 눈에 밟혔다. 광화문 사거리부터 종각까지 3개나 보였다. “실종된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 허공에 걸린 이 외침은 “(시장으로, 국회의원으로, 대통령으로) 저를 뽑아주세요!” 따위와는 견줄 수 없을 만큼 절박하다.
가정의 달이 되면 실종자 가족은 더 괴롭다. 딸을 잃어버린 아버지 송길용(68)씨는 22년이 지나도록 송혜희를 찾고 있다. 현수막이 깨끗한 까닭은 주기적으로 점검하며 고쳐 달기 때문이다. 작년 5월에 만난 송씨의 트럭에는 딸 사진(현재 모습 추정)을 실은 전단 뭉치가 수북했다. 그만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묻자 “몸이 허락하는 날까지는 해야죠. 내가 아빠잖아요”라고 했다.
“주변에서 ‘집착을 버리라’고 하지만 이걸 해야 마음이 편해요. 그래야 잠을 잘 수 있습니다. 제일 고마운 게 뭔지 아세요? 전국 어딜 가도 현수막을 함부로 떼지 않아요. 총선, 대선이 있어도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를 피해서 현수막을 겁니다. 그걸 보며 생각해요. 다들 자식 키우는구나. 딸 잃은 부모의 애통한 심정을 헤아려주는구나···.”
인지상정 두 가지를 읽을 수 있다. 딸을 상실한 아버지가 짊어진 ‘책임감’, 그 가족을 향해 우리가 느끼는 ‘마음의 빚’이다. 그런데 국가가 국민을 잃고도 책임을 회피하는 야만적인 일이 벌어졌다. 지난해 9월 서해에서 북한군에게 피살돼 시신이 불태워진 해양수산부 공무원은 법적으론 지금도 ‘실종 상태’다. 그의 딸(9)은 아빠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무너져요. 동생이 원양어선을 조사할 때 몇 달씩 집을 비운 적이 있어 ‘해외 출장 중’이라고 했대요. 끔찍하게도 이 정부는 골든타임 때 동생을 구조하기는커녕 월북자로 몰아갔습니다. 이야기를 꾸미려면 기승전결이 필요한데 기승전은 없고 월북이래요. 조용히 덮자고 입을 맞췄는지, 의문을 제기해도 해경이나 통일부나 청와대나 응답이 없습니다. 오죽하면 미국 대통령과 유엔에 진상 조사를 요청하겠습니까?”
실종 공무원의 형 이래진씨는 며칠 전 통화에서 “국가는 나 몰라라 하고 시신도 없어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며 울분을 토해냈다. “작년 10월 고교생인 조카(실종 공무원의 아들)가 보낸 편지에 문재인 대통령이 ‘내가 직접 챙기겠다’고 했지만 6개월이 지나도록 북한 눈치나 보면서 아무것도 규명한 게 없고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억해야 하는 국민, 망각해도 되는 국민이 따로 있나? 대통령은 올해 서해수호의 날 기념사에서 “지난 4년간 서해에서 무력 충돌이나 군사적 도발로 다치거나 생명을 잃은 장병이 한 명도 없다”고 말했지만 경계 실패로 북한 해역에서 우리 국민이 사살된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7년이 지난 세월호 사건은 인양해야 할 진실이 더 있는 것처럼 재조사하고 우려먹으면서, 지난가을 북한이 저지른 만행에는 진상을 밝히려는 노력도 진심 어린 사과도 없다. 김정은이 보냈다는 통지문 한 장으로 퉁칠 모양이다.
지난 재·보궐선거 때 더불어민주당은 ‘사람에 투표해 주십시오’라는 홍보물을 만들었다. 판세가 아무리 불리해도 그렇지 ‘사람 vs 사람 아님’의 갈라치기는 엽기적이었다. 집권 여당이 패했으니 ‘사람도 아닌 것들의 승리’인가?
인권 변호사 출신으로 ‘사람이 먼저다’를 외쳤던 나라님에게 묻고 싶어진다. 측근과 북한에 대해서는 그토록 안타까워하면서, 억울하게 피살된 국민에게는 왜 책임감도 마음의 빚도 느끼지 못하느냐고. 정치적 실익이 없는 인권은 인권이 아니냐고. 어린이날 아빠를 기다리는 아홉 살 소녀에게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지 않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