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체조 ‘아리랑’은 1박 2일 평양 출장의 하이라이트였다. 나는 능라도 5·1 경기장에 앉아 있었다. 2005년 가을, 북한은 노동당 창건 60주년을 맞아 관광객의 방북을 허용했고, 체제를 선전하며 외화를 챙기고 있었다. ‘아리랑’ 1등석을 150달러에 팔았다.

북한 집단체조 '아리랑'/조선일보 DB

눈앞에서 글자들이 명멸했다. ‘만경대’ ‘모란봉’ ‘대동강’···. 배경대(背景臺)라는 카드섹션이었다. 북한 중학생 2만명이 커다란 색종이들을 일사불란하게 펴고 접었다. 감탄은 연민과 공포로 바뀌었다. 부품처럼 움직이기까지 혹독한 연습과 고통이 있었을 것이다. ‘아리랑’은 김일성의 항일 투쟁으로 열려 선군(先軍)과 행복, 통일을 지나 강성 부흥으로 닫혔다. 관중으로 선별됐을 북한 주민들은 모두 기립해 김일성 찬양가를 불렀다.

‘아리랑’은 기괴한 쇼였다. 껍데기는 사회주의 지상낙원이었고 알맹이는 공허했다. 평양에서는 관광객을 데려간 장소와 접촉한 사람, 심지어 옥류관 냉면까지 각본에 따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아리랑’을 보던 남쪽 진보 단체 참관단이 한반도기를 흔들며 “조국 통일”을 외치자 북한 주민들이 일어나 화답했다. 이 또한 선전물로 쓰일 터였다. 위장된 평화에는 꿍꿍이가 있었다. 김정일은 이듬해 첫 핵실험을 했다.

김정남 암살의 숨겨진 이야기를 추적한 다큐멘터리 영화 '암살자들'. 미국 라이언 화이트 감독이 만들었다. /더쿱

12일 개봉하는 ‘암살자들’은 북한을 상대해야 하는 대통령이 꼭 봐야 할 영화다. ‘아리랑’이 허구라면 이것은 사실이다. 2017년 2월 13일 대낮에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김정남이 살해당했다. CCTV가 즐비한 국제공항은 암살에 부적합한, 안전한 장소다.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의 최후를 보고 세계가 경악했다. 인도네시아·베트남 국적의 두 여성이 그의 얼굴에 치명적 화학물질을 발랐다. CCTV에 녹화된 이 암살은 의도된 공개 처형이었다.

2001년 김정남은 위조 여권을 가지고 일본에 들어가다 적발돼 추방당했다. “가족과 도쿄 디즈니랜드에 가고 싶었다”고 그는 말했다. 이 사건으로 후계 구도에서 완전히 밀려난 김정남은 마카오 등 해외를 떠돌며 낭인 생활을 했다. 살해당할 때는 뚱뚱하고 무력한 중년 남성이었다. 하지만 김정은에게 그는 오용 가능성이 있는 위험 요소였고 제거해야 할 백두 혈통이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암살자들'에서 김정남이 2017년 2월 13일 오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 혼자 백팩을 들고 서 있다. 공항 CCTV에 녹화된 장면이다. 그는 두 여성이 뒤에서 얼굴을 문지른 뒤 1시간도 안 돼 사망했다. /더쿱

‘암살자들’은 김정남 피살부터 재판 종결까지 2년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두 여성은 침착하게 행동했고 곧장 화장실에서 손을 닦았다. CCTV를 향해 ‘그래 내가 했다. 어쩔래?’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쓴 두 화학물질은 혼합될 경우 신경 작용제 VX를 만드는데, 국제적으로 사용이 금지된 화학무기였다. 작전을 주도한 북한 공작원들은 중국을 피하려는 듯 자카르타, 두바이,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평양으로 도주했다.

두 여성은 법정에서 “일본 유튜버(북한 공작원)에게 속아 몰래카메라를 찍는 줄 알고 연기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오래전부터 몰카를 촬영하는 대가로 돈을 받았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사건 직전엔 북한 공작원이 연습용으로 커다란 곰 인형을 사 줬다. 그들은 코미디로 위장된 암살의 배우였고 마지막 촬영의 표적은 김정남이었으며, 그날만 베이비오일 대신 화학무기가 사용된 것이다. 공작에 당한 두 여성은 가까스로 무죄판결을 받고 석방됐다.

북한 공작에 속아넘어간 두 여성 시티 아이샤(인도네시아)와 다안 티 흐엉(베트남). 이들은 김정남 암살에 참여하고도 몰래카메라 장난 영상인 줄 알았다. 북한 공작원들로부터 이용당하고 버려졌지만 2년 재판 끝에 무죄로 석방됐다. /더쿱

죽은 사람은 있는데 죽인 사람은 없다. 스티븐 킹 뺨치는 각본 아닌가. 북한은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빠져나갔다. ‘너희도 안전하지 않다’는 협박은 지속된다. 선전 선동 책임자 김여정은 한미 연합 훈련에 대해 “희망이냐 절망이냐? 선택은 우리가 하지 않는다”는 극적인 대사를 던졌고 효과를 거뒀다. 다음 대통령은 장기판의 말로 이용당하지 않아야 한다. 북한은 지금 남쪽의 동요와 갈등을 몰카 보듯 감상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