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사태에서 눈길을 잡은 말이 두 가지 있었다. 첫째는 아프간 대통령이 해외로 도망친 뒤 한 변명이었다. 그는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해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군 최고통수권자가 부하들에게 싸우지 말라고 한 것이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후일 “대통령은 나와의 통화에서 ‘죽기로 싸우겠다’고 하고선 그 다음 날 가버렸다”고 했다.
다른 하나는 ‘유령 군인(ghost soldiers)’이다. 아프간 정부군이 급속히 무너진 이유를 분석하는 기사에서 BBC가 쓴 용어다. 부패한 지휘관들이 존재하지도 않는 유령 군인을 장부에 올려 급여를 착복했다는 것이다. 아프간군은 문서상으로는 30만명이 넘었다. 하지만 실제 병력은 6분의 1 수준이라고 했다. 이런 군대가 전쟁에서 이길 수는 없다.
아프간 패망에는 많은 이유가 있지만 핵심은 여기에 담겨 있다. 탈레반이 공격해오자 정부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거나 도주했다. 탈레반은 “정부군이 생각보다 빨리 카불을 버려서 놀랐다”고 조롱했다. 미국은 20년간 약 97조원을 들여 아프간군에 무기를 지원하고 훈련시켰다. 기강 무너진 군대에 최신 장비는 무용지물이었다. 미군이 철수를 시작한 지 석 달 만에 아프간군은 나라를 내줬다. 국민들은 IS의 참혹한 테러로 피를 흘리고, 난민이 돼 떠도는 처지가 됐다.
46년 전 베트남 패망 때도 유령 군인이 있었다. 전쟁기념관 자료에 따르면 당시 남베트남 군사력은 정규군 57만명, 전차 600대, 화포 1500문, 함정 1500척, 항공기 1270대 등 북베트남을 압도했다. 공군력은 세계 4위 수준이었다. 그러나 전쟁 승패는 군사력의 우열이 가르지 않았다. 월남군 57만 중 10만명 정도가 뇌물을 주고 대학을 다니거나 기업에 취업했다. 수뇌부는 미군이 지원한 전투기, 탱크 등 무기를 월맹군에 팔아먹었다. 미군 철수 2년 뒤 북베트남이 밀고 내려오자 남베트남은 4개월 만에 항복했다.
아프간 뉴스가 쏟아질 때 친분 있는 예비역 대령 한 분이 “미군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우리 군이 핵 가진 북한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한국과 아프간은 국력이 다르고 안보 상황이 다르다. 하지만 그는 “군의 생명은 군기와 전투 의지라는 근본은 똑같다”고 했다.
우리 군의 기강 해이 조짐은 차고 넘친다. 북한 남성이 바다를 헤엄쳐 넘어와 수㎞를 이동하면서 감시장비에 포착됐지만 아무 조치도 안 했다. 1식4찬 기본 지침도 지키지 않은 부실 급식은 국방예산 52조원 시대에 부끄러운 일이다. 장병들 사기와 직결되는 문제다. 성추행 피해를 입은 여군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건이 육·해·공군 모두에서 터져나왔다. 2차 가해와 은폐 의혹까지 있다.
제대로 된 훈련도 하지 않는다. 한·미 연합훈련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만 하고 있다. 올 후반기 훈련은 그나마 대폭 축소했다. 방역 핑계를 대지만 북한 눈치를 보는 것이다. 2018년 미·북 정상회담 이후 3대 연합 훈련을 모두 없앴다. 병력과 장비가 동원되는 대규모 야외 실기동훈련은 2018년 독수리 훈련을 마지막으로 3년째 안 하고 있다. 9·19 남북군사합의의 비행금지구역 규정 때문에 군 최대 규모의 대공사격장은 쓰지도 못하고 있다. 육군 자료에 따르면 아파치 헬기 사격 훈련은 2017년 13회였지만 지난해엔 5회로 줄었다. 평화를 얻으려면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 훈련 때 땀방울은 전시의 피를 줄일 수 있다.
바이든 미 대통령은 “아프간군이 스스로 싸우려 하지 않는 전쟁에 미군이 대신 싸울 순 없다”고 했다. 당연해서 무서운 말이다. 군 수뇌부는 우리 군이 당장 오늘 밤 싸울 준비가 돼 있는지 자문해봐야 한다.